<창덕궁 후원의 꽃 부용정(芙蓉亭)>
앞서 블로그에 올린 '수계(水禊)에 대한 용어 정리'에서 언급한 내용들을 지금 다시
기억의 창고에서 꺼내보기 바란다.
조선 제 22대 왕인 정조는, 1788년(정조 12년)부터 규장각 관원과 함께 봄마다 창덕궁 후원에서
꽃구경과 낚시를 하는 특별한 모임인 내원상조회(內苑賞釣會)를 정례화했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 1792년 모임부터는, 각 관원의 자제들까지 참석하도록 배려했다.
이전의 다른 임금들은 단 한 번도 하지 않은, 상상도 못했던 일들이다.
그 전까지 창덕궁 후원은 왕과 왕실가족, 또는 왕의 초대를 받은 삼공육경(三公六卿) 정도의
고위관리만 들어갈 수 있는 '비밀의 화원'이었다.
그래서 창덕궁 후원을 '금할' 금(禁) 字를 써서 금원(禁苑)이라고 불렀다.
한데 정조는 규장각 관원들과 후원에서의 정례모임을 만들고, 심지어 그의 자제들까지 함부로
범접할 수 없던 창덕궁 가장 깊숙한 후원까지 불러들였다.
이런 파격적인 행보는, 정조의 관엄(寬嚴)한 성격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정조는 엄격함과 관대함... 이 두 가지를 다 지녔던 왕이다.
도량이 넓은 한편, 매우 엄숙했다.
생각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았다는 건, 편협함을 뛰어넘은 사유와 사고방식의 광대함을 뜻한다.
반대로 사상과 이념, 취향이 어느 한쪽으로 극단적으로 치우쳤다는 것은 사유가
부족하고, 사고방식이 조협(躁狹)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성품 때문인지 정조는 문무(文武)에 모두 뛰어났다.
문(文) 못지않게 무(武)에도 뛰어나 <무예도보통지>를 편찬했고, 태조처럼 신궁(神弓)으로 불렸다.
정조는 평소, 문무(文武)는 수레의 두 바퀴나 새의 두 날개처럼 조화를 이뤄야 한다며 문무겸전 (文武兼全)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문(文)에 치우치면 심약하고, 무(武)에 치우치면 인간이 무모해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하들에게 "문장을 아름답게 꾸밀 줄 알면서 활을 쏠 줄을 모르는 것은, 문무를 갖춘 재목이 아니다."라고 단정했다.
그래서 가장 아끼던 규장각 관원들을 북영(北營)에 잡아놓고 활쏘기 훈련을 시켰다.
정약용 일행은 북영에 들어간지 열흘 만에야 활 솜씨가 향상된 것이 인정돼 겨우 풀려날 수 있었다.
그의 개방성과 개혁성, 진보성은 바로 이런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은' 성품과 상당한 연관이
있다고 볼 수 있다.
정조는 아버지인 사도세자가 10년을 길렀고, 할아버지인 영조가 14년을 길렀다.
때문에 할아버지인 영조의 교육과 영향을 더 많이 받았다.
전문가들은 만약 정조가 사도세자의 양육만 받고 자랐거나, 또는 영조가 손자인 정조에게 관엄함을
가지고 극진히 손자를 교육시키지 않았다면, 정조 또한 연산군 못지 않은 임금이 됐을 것이라고 얘기하곤 한다.
정조에 대해 따뜻한 시각으로 바라보는 나 또한, 이들의 의견에 동의한다.
사료에 나오는 정조의 때때로 이해 못할 격한 과잉 감정의 표출을 보면, 일면 수긍이 가고도 남는다.
정조는 어린 시절에 겪은 아버지와 관련된 트라우마 때문에 평생을 힘들게 살았다.
하지만, 조부인 영조가 사랑으로 교육시킨 영향을 더 많이 받아 훌륭한 왕으로서의 자질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호학왕(好學王)으로 불릴만큼 책을 좋아했고, 조부로부터 정치하는 법을 배웠다.
거기다 선대 왕들이나 조부가 갖고 있지 않았던 개혁성과 개방성, 진보성은 물론 호방함까지 갖춰
후대에 성왕으로 불리게 됐다.
정조의 총신(寵臣)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 이덕무 등 규장각 검서관이다.
1795년(정조 19년) 음력 3월, 정조는 규장각의 각신과 그 아들, 조카, 형제들에까지 그 범위를 넓혀
창덕궁 후원 연회에 초청해 꽃구경과 함께 부용정에서 낚시를 했다.
이는 송(宋)나라 때, 황제의 문집과 책을 소장하는 천장각(天章閣)을 마련한 뒤 매년 궁궐 후원으로
신하들을 불러 함께 꽃구경과 낚시를 하며, 군신간에 詩를 지으며 즐겁게 노닐었다는 고사(故事)를
본뜬 것이다.
한데, 혹여 초청받은 신하와 그 가족들이 임금에게 신뢰를 받았다는 점에 대해 자만할까 저어하여,
연회에 참석한 신하들에게 이런 유시(諭示)까지 내렸다.
예로부터 내원(內苑)의 놀이에는 척리가 아니고서는 들어와 참여할 수가 없었으니,
외신(外臣)을 내연에 참여시킨 것은 특별한 은전이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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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춘저 때부터 어진 신하를 내 편으로 하고, 척리는 배척해야 한다는 의리를 깊이
알고 있었다.
그래서 즉위 초에 맨 먼저 내각(內閣)을 세웠던 것이니, 이는 문치 위주로 장식하려
해서가 아니라 대체로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있게 함으로써 나를 계발하고, 좋은 말을
듣게 되는 유익함이 있게끔 하려는 뜻에서였다.
그리하여 좋은 작위(爵位)로 잡아매 두고 예우하여 대접하면서, 심지어는 한가로이
꽃구경하고 낚시질할 때까지도 각신과 함께 즐거움을 같이하고, 그들의 아들, 조카, 형제
역시 모두 연회에 참석하도록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예법을 간소화하여 은혜로 접하고, 한데 어울려 기뻐하고 즐기는 것을 정례화하고
있느니, 이런 대우와 사랑이야말로 예로부터 신하로서는 얻기 힘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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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사대부를 가까이 하려는 것이야말로 나의 평소 성격인 동시에 내가 고심하는 것이니,
수십 년 동안 행해 온 일을 지금 중도에 그만둘 수는 없는 일이다.
이에 특별히 경들을 불러 나의 속마음을 펼쳐 보여주게 되었으니 이 자리에 참석한 여러
신하들은 각자 두려운 마음을 갖고 경계하여, 오늘 내가 유시(諭示)한 것을 잊지 말도록
하라!
과연 정조답다.
王의 관엄한 성격이 그대로 묻어나는 대목이다.
내가 정조에 대해 늘 애틋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참고>
* 춘저(春邸)란?
보통 왕세자 시절 살던 저택을 말한다..
여기에서는 정조의 왕세손 시절을 뜻한다.
* 척리(戚里)란?
임금의 내척(內戚)과 외척(外戚)을 말한다.
* 내각(內閣)이란?
규장각(奎章閣)을 뜻한다.
정조 원년인 1776년 설치해 역대 임금의 글과 글씨, 보감(寶鑑) 등을
보관하고 관리하던 왕실 도서관을 말한다.
* 유시(諭示)란?
타일러 가르치거나, 일러 알아듣게 하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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