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s://img1.daumcdn.net/thumb/R460x0/?fname=https%3A%2F%2Ft1.daumcdn.net%2Fblogfile%2Ffs2%2F29_17_17_29_02Kjp_IMAGE_0_39.jpg%3Fthumb&filename=39.jpg)
여승(女僧)
어느해 봄날 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종일 방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을 쓴 여승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 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 발치로 바리때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 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을 뒤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 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 앞에서
내 가슴이 그 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 흐르기를 기도하며 시를 쓴다.
~* 송수권(宋秀權) *~
* 내가 가장 좋아하는 詩이다. 이 詩를 아주 오래전, 처음 읽었을 때의 그 아름다움과 슬픔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지금도 생생하게 감동이 느껴진다.
나는 이 시를 읽은 후부터, 詩를 좋아하기 시작했다.
기원 전 5,000여 년 전의 戀歌부터 중국의 詩經, 그리고 동서양의
고전시에서 현대시에 이르기까지 모든 시를 다 좋아하게 됐다.
그래서 송수권의 '여승(女僧)'은 내게 아주 특별한 詩이다.
그 때문일까?...이몽(異夢)의 주 무대가 내가 만들어 낸 '혜각사'이고, 주인공인
'원범'과 '봉이'의 애련한 사랑 이야기도 주로 혜각사를 무대로
전개된다. 또 지명선사와 처사, 보살, 동영, 분애도 혜각사에서
사는 것으로 나온다.
그만큼 이 詩는 내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독자들이 나를 불교신자로 알고 있거나, 불교방송에서 일했다는
엉뚱한 소문이 났던 것도 이 때문이다.
이몽을 읽은 불교 쪽 인사들이 "불교를 아주 자연스럽고 정확하게
잘 표현했다."고 칭찬했을 정도이다.
그동안 아껴두었던 詩... 오늘 당신에게 들려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