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 유명한 왕희지의 난정집서(蘭亭集序)...
매우 철학적인 내용입니다.
자세히 되뇌어 읽어보세요.
蘭亭集序
(난정집서)
永和九年 영화 9년
歲在癸丑 暮春之初 해는 계축년 3월 초
會於會稽山陰之蘭亭 회계 산음현의 난정에 모여
修禊事也 계제사를 거행한다.
群賢畢至 少長咸集 여러 현자들이 모두 모이고,
젊고 나이든 이 함께 모였다.
此地有崇山峻嶺 이 땅은 높은 산 가파른 고개 있는 곳
茂林脩竹 무성한 숲과 높은 대나무들
又有清流激湍 또 맑은 시냇물 급한 여울이
映帶左右 좌우를 비추는 곳
引以爲流觴曲水 물을 끌어 들여 유상곡수라 여기고
列坐其次 그 옆에 나란히 앉았다.
雖無絲竹管弦之盛 비록 성대한 음악소리 없지만,
一觴一詠 술 한잔에 시 한수
亦足以暢敘幽情 역시 그윽한 정취 화창하게 펼치기 족하네.
是日也 오늘은
天朗氣清 惠風和暢 하늘은 맑고 공기는 청명하며 따사로운
바람 화창했다.
仰觀宇宙之大 우러러 우주의 장대함을 보고
俯察品類之盛 굽어보며 사물의 무성함을 보네.
所以遊目騁懷 눈이 가는대로 회포를 달리게 하고
足以極視聽之娛 지극한 보고 듣는 즐거움에 만족하니
信可樂也 가히 즐길만 함이 확실하다.
夫人之相與 俯仰一世 무릇 사람이 함께 어울려 한세상을
함께하는데
或取諸懷抱 여러 회포를 가지고
晤言一室之內 한방에서 얼굴 마주하고 이야기하기도 하고
或因寄所托 혹은 자연이 맡긴 이유를 찾아
放浪形骸之外 자신을 떠나 방랑하기도 한다.
雖取捨萬殊 비록 취하고 버림이 모두 다르고
靜躁不同 고요하고 조급함이 같지 않지만
當其欣於所遇 만나는 것에 당연히 기뻐하고
暫得於己 快然自足 잠시 자신에게서 자신을 얻고 스스로
만족함에 기뻐하며
不知老之將至 늙음이 장차 온다는 것도 모르리라.
及其所之既倦 그러다 이미 싫증나는 바가 있고
情隨事遷 세상사 바뀜에 따라 정도 바뀌고
感慨繫之矣 그윽한 마음 또한 그에 묶여 있지 않던가.
向之所欣 俯仰之間 그 기뻤던 쪽으로 향해 고개 숙였다가
드는 사이
已爲陳跡 이미 흔적이 되네.
猶不能不以之興懷 어찌 즐거운 회포로 여기지 않을 수
없겠는가.
況脩短隨化 終期於盡 하물며 길고 짧음도 변화가 있어
반드시 그 끝이 있으니
古人云 옛 사람이 말하기를
死生亦大矣 豈不痛哉 삶과 죽음 역시 크다 했으니
어찌 비통하지 않으리.
每覽昔人興感之由 매양 옛사람의 감흥의 이유를 보면
若合一契 마치 계약처럼 일치하니
未嘗不臨文嗟悼 일찌기 글을 대하면 탄식하지 않을 수 없고
不能喩之於懷 마음 속에 그것을 깨우쳐 줄 수 없었다.
固知一死生爲虛誕 삶과 죽음을 하나라고 하는 것은
허망한 소리요,
齊彭殤爲妄作 팽조와 요절을 나란히 하는 것은
망령된 짓이다.
後之視今 후인들이 지금을 보는 것은
亦猶今之視昔 지금 우리가 옛 사람들을 보는 것과 같으니
悲夫!故列敘時人 슬프다! 그래서 지금 사람들을 순서대로
적고
錄其所述 그 지은 바를 기록했다.
雖世殊事異 비록 세대가 달라지고 일이 바뀌어도
所以興懷 其致一也 감회를 일으키는 바는 아마 같을 것이다.
後之覽者 뒷날 보는 사람은
亦將有感於斯文 역시 장차 이 글에 느낌이 있으리.
~* 왕희지(王羲之) *~
<난정집서(蘭亭集序)>
왕희지(王羲之)가 서가(書家)로 명성을 떨치게 된 것은 바로 이 난정집서 때문이다.
입신(入神)의 경지에 이르러 쓴 글씨라 해서 '천하 제1행서'라고도 불린다.
그러나 난정서(蘭亭序)는 詩가 아니다.
詩를 엮은 난정집(蘭亭集)의 서문(序文)이다.
난정집은 중국 동진(東晉)의 서예가 왕희지가 47살 때인 353년 3월 3일, 지금의
절강성 소흥인 회계군 산음(山陰)에 있는 아름다운 정자 난정(蘭亭)에 당대의
명사 41명을 초대한 다음, 수계(水禊)를 열면서 지은 시를 엮은 문집이다.
'수계'란, 음력 삼월 삼짇날에 맑은 계곡물에서 몸을 씻어냄으로써 겨우내 쌓인
묵은 때와 부정한 기운을 떨쳐버리는 세시풍속을 말한다.
최초의 문인 시회(詩會)인 셈이다.
왕희지 일행은 강물을 끌어들여 아홉 구비를 만든 곳에 앉아서 물을 따라 흘러오는
술잔을 마시고 바로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를 마시는 곡주연(穀酒宴)을 열었다.
유상곡수연(流觴曲水宴)이란... 포석정같은 시설에 물이 흐르게 하고 물길을 따라
잔을 흐르게 한 다음, 술을 마시고 시를 짓는 놀이를 말한다.
바로 이때 문인 21명이 쓴 詩 37수가 태어났고, 그 시집에 왕희지가 붓을 들고 쓴
서문이 바로 난정집서(蘭亭集序)이다.
한데 詩보다 왕희지의 서문이 더 인기가 많아, 후대 사람들은 이 풍속을 화제(畵題)로
삼아 <난정수계도(蘭亭水禊圖)>를 그려 이 날을 기념했다.
위의 '난정집서'에서 왕희지는 만화 방창한 봄의 아름다운 때 연회를 여는 기쁨과,
영원히 존재하는 하늘과 땅에 비해 인생이란 얼마나 허망하고 짧은지 모른다는 세월의
흐름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을 토로했다.
또 이런 마음은 어느 시대이건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적었다.
자세히 읽어보면 상당히 철학적인 내용이다.
흥에 겨워 왕희지가 쓴 300여 자의 서문이 얼마나 명필인지, 그 자신이 쓴 글씨에
스스로 반해 똑같이 쓰려고 몇 십번을 시도했지만 결국 똑같은 글씨는 쓰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이 서문이 후대에 유명해진 것은 바로 당나라 2대 황제인 태종 때문이다.
왕희지 글씨에 반한 태종은, '난정집서'가 왕희지의 9대손으로 출가한 지영선사에게
있다가 그의 사후, 제자인 '변재' 스님이 전해받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감찰어사 '소익(肖翼)'을 파견해 교묘한 책략으로 강제로 뺐었다.
<소익잠난정>이란 고사가 생겨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태종 '이세민'은 난정집서를 취한 뒤, 늘 곁에 두고 완상(玩賞)했다.
왕희지를 위해 직접 찬(讚)을 지은 뒤, 그의 글씨가 모든 아름다움을 다했다고 격찬했다.
그리고 죽기 전 태자를 불러 "내가 죽으면 이 글씨를 함께 묻어달라."고 부탁했다.
이렇게 해서 '난정집서'의 진적은 태종의 죽음과 함께 순장됐다.
그 후, 당 말의 혼란기에 태종의 능묘가 도굴되면서 '난정집서'는 행방불명됐다.
그렇다면 '난정집서'가 어떻게 지금까지 전해져 내려올 수 있었을까?...
태종의 선견지명 때문이다.
태종은 생전에 학사원에 명해서, '난정집서'를 돌에 새기도록 했다.
그리고 훗날, 그 돌이 발견되면서 1700여 년 전에 왕희지가 쓴 '난정집서'의 글씨가
지금까지 전해지게 됐다.
앞서 블로그에 올린 왕희지의 '쾌설시청첩(快雪時晴帖)'에서 언급했지만, 왕희지의
'평안첩'은 진품을 복제한 모본임에도 불구하고 무려 523억 원에 팔렸다.
왕희지의 글씨는 모두 다 모본이다.
그래도 그 가치가 엄청나 여러나라 국보로 지정돼 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그래서 중국에서는 왕희지를 서성(書聖)으로 추앙하고 있다.
내가 블로그에서 공개하는 왕희지의 글씨들은 가격을 정할 수 없을만큼의 세계적인
보물들이다.
왕희지의 현존 서첩으로는 해서(楷書)에 '동방삭화찬'과 '황정경', 그리고 행서(行書)에
'난정서'와 '성교서', 그리고 초서(草書)에 '십칠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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