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망사(春望詞)
花開不同賞 꽃이 피어도 함께 감상할 수 없고
花落不同悲 꽃이 져도 함께 슬퍼하지 못하네
欲問相思處 묻고 싶어라 그리운 그대 있는 곳
花開花落時 꽃피고 꽃 지는 이 시절에
攬草結同心 풀을 뜯어 동심결을 묶어
將以遺知音 이것으로 소식을 보내려 해보네
春愁正斷絶 봄날의 수심을 없애려는 바로 그때
春鳥復哀吟 봄새는 다시 슬프게 운다
風花日將老 바람에 꽃은 곧 지려하는데
佳期猶渺渺 아름답던 기약은 점점 묘연해진다
不結同心人 사람의 마음은 함께 묶지 못하고
空結同心草 공연히 동심초만 묶고 있구나
那堪花滿枝 어찌하리 꽃 가득한 저 가지
飜作兩相思 꽃잎 날리면 두 그리움이 될 것을
玉筯垂朝鏡 옥 같은 눈물 아침 거울에 떨어지는데
春風知不知 봄바람아, 아느냐 모르느냐
~* 설도(薛濤) *~
* 설도
당나라 때의 기녀(妓女) 출신 여류시인이다.
장안 출신으로, 자는 홍도(洪度)이다.
당대의 문학사에서 여류시인을 언급할 때, 설도라는 이름을 거론하지 않고는
논의할 수 없을 정도의 존재감이 있는 예술인이다.
부친 설운(薛鄖)이 사천성 성도(成都)의 자사(刺史)로 부임하자, 부친을 따라
성도에서 살았다.
부친이 반란을 진압하는 도중에 전사한 뒤, 충격을 받은 모친 또한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의지가지 없는 설도는 16세 때 기예를 파는 고급 기녀가 돼 악적(樂籍)에 이름을
올렸다.
문재(文才)가 뛰어난 설도는 여덟 살 무렵에 詩를 지었고, 어려서부터 음률과 시,
서예 등 다양한 예술분야에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했다.
용모 또한 꽃처럼 아름다워 재색을 겸비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로 인해 성도의 명기로 이름을 떨쳤다.
설도는 매우 총명해 설도전(薛濤箋)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색종이도 발명했다.
唐代에는 사람들이 백지(白紙)에 詩를 써서 전하는 것을 불길하다고 여겼다.
그래서 색깔 있는 종이에다 詩나 편지 쓰는 것을 좋아했다.
그래서 설도는 집 근처의 종이 공장들을 잘 관찰한 후, 꽃물을 넣은 붉은 색깔의
색종이에다 그림을 그려 자신의 詩를 적어 친지들에게 보내곤 했다.
이를 본 사람들이 종이의 아름다움에 감탄해 '설도전'이라고 이름 붙인 뒤, 모두들
갖고 싶어 했다.
설도전이 유명해지자 나중에는 황실에서도 설도전을 사들일 정도로 귀한 물건이
됐다.
설도의 인생에는 중요한 두 남자가 등장한다.
첫번 째는 사천절도사로 부임한 위고(Wei Gao)라는 군사장관이다.
설도의 재능에 감탄한 그는 설도를 자신의 교서랑(校書郞)으로 임명하려 시도했을
정도로, 설도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여자에게 일찍이 그런 벼슬을 내린 적이 없다며 결사 반대하는 부하들 때문에
이 시도는 불발됐다.
그러나 설도를 총애한 위고는 독자적으로 공식적인 관명인 교서(校書, Collator)를
부여했다.
결국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설도를 대우해 줄 수밖에 없었다.
그 후로, 기녀를 교서(校書)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20년 연상인 막강한 후원자 '위고'는 61세로, 설도 나이 38세 때 사망했다.
위고는 무려 21년 동안이나 절도사를 역임했다.
때문에 21년 동안 설도를 돌보아주며, 탁월한 예술인으로 성장하게끔 후원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그의 격려와 막강한 후원으로 설도의 文才는 唐의 수도인 장안에까지 유명세를 떨쳤다.
'위고'는 죽기 전, '설도'를 기적에서 빼내 자유로운 몸으로 만들어 주었다.
뿐만 아니라 재산까지 일부 나누어 주었다.
죽는 순간까지도 설도에 대한 후원자 역할을 충실히 한 것이다.
기녀에서 풀려난 설도는 두보가 살았던 장강 지류인 금강 주변의 아름다운 완화계
(浣花溪) 옆에서 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사랑은 움직이는 것인가?...
설도에게 또 한 명의 남자가 운명적으로 나타났다.
이번에는 설도가 홀딱 반해 마음을 더 먼저 주고, 더 많이 주고, 더 깊게 주게 된
남자였다.
거기다가 무려 10년이나 연하였다.
바로 당대의 촉망받는 시인이었던 원진(元鎭)으로, 그는 동천감철어사로 좌천돼
성도에 오게 됐다.
그녀의 명성을 흠모해 찾아온 원진을 보고 한눈에 반한 설도는 그의 문학적 재능을
알아본 뒤, 몹시 아꼈다.
그래서 아름다운 꽃물로 만든 설도전에 백여 편의 詩를 써서 주며 '원진'을 위로했다.
이로 인해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사랑에 빠졌고, 일 년여를 영원처럼 사랑하며 함께
보냈다.
그리고 다시 만날 것을 기약하며 둥근 벼루를 반으로 나누어서 하나씩 간직하며,
사랑의 정표(情標)로 삼았다.
그러나 이것이 두 사람 사랑의 마지막이었다.
배를 타고 떠나간 원진은 다시는 설도에게 돌아오지 않았다.
원진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원진은 옛날 은사였던 위하경(韋夏卿)을 만났다.
한데 '설도'와의 소문을 들은 은사는 기생한테 빠져있다고 제자를 책망하며, 원진이
자신의 조카와 혼인하기를 권했다.
은사의 질녀인 위(韋)씨녀는 급기야 반쪽 벼루를 갖고 성도로 설도를 만나러 가는
원진의 앞을 가로막으며 벼루를 시냇물에 빠트려버렸다.
결국 원진은 위씨녀와 결혼했고, 다시는 성도로 돌아가지 않았다.
설도는 문설주에 기대서 넋이 나간 채, 매일 원진을 기다렸다.
사연을 알게 된 설도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마침내 아픈 사랑을 단념하게 됐지만,
죽는 날까지 평생 원진을 잊지 않고 일편단심 사랑하며 그리워했다.
설도는 원진 외에도 백거이, 두목, 유우석, 장덕, 무원형 등 당대의 유명한 문인들과
동등한 예술인의 입장에서 교유했다.
또 관료나 장수로는 위고와 고숭문(高崇文) 등 20명이 넘는다.
이들과의 교류는 <전당시(全唐詩)> 안에 수록된 여러 시인들의 작품에서 발견할 수
있다.
후에 다시 당대의 대풍류객인 두목(杜牧, 803~852)과도 사랑에 빠졌으나, 설도가
연상인 점이 또 문제가 돼 이마저도 비련으로 끝났다.
설도는 당대의 저명한 시인으로 평생 품위를 지키며 살았다.
만년에는 도교(道敎)에 입문해, 여도사(女道士)로 여생을 마쳤다.
때문에 설도의 생몰년도는 정확하지 않다.
향년 61세라는 설도 있고, 75세라는 설도 있다.
500여 편의 시를 쓴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현재는 일부분만 전해져 내려온다.
<금강집> 5권이 남아있다.
위의 詩 춘망사(春望詞)는 원진을 그리워하며 쓴 시이다.
우리나라의 가곡 동심초는 바로 설도의 춘망사 4수(首) 중 3수(首)를 소재로 하여
만든 노래이다.
4월 11일에 올린 블로그 글 <매화 닮은 명기, 매창>에는 매창의 죽음 후 허균이
애통해 하며 지은 시가 끝부분에 나와있다.
그 시의 맨 끝부분에 "설도의 무덤을 누가 찾으리."란 문장이 나온다.
허균은 매창을 '조선의 설도'로 생각한 것이다.
과연, 매창에 대한 최고의 평가이다.
그렇다면 몰인정하게 돌아선 원진은 설도를 한번이라도 생각해 본 적이 있을까?...
그가 남긴 詩를 한번 살펴보자.
曾經滄海難為水 일찍이 바다를 보고나니 강물은 대수롭지가 않고,
除卻巫山不是雲 무산의 구름을 보고나니 구름이라 할 것이 없네.
取次花叢懶回顧 아름다운 꽃을 봐도 즐겁지 않은 것은
半緣修道半緣君 반은 수도를 한 때문이고, 반은 내가 님을 그리기
때문이라오.
여기에서 님은 설도를 가리킨다.
원진도 평생 설도를 잊지 못했다.
설도를 보고 난 후 원진의 눈에는 다른 여인은 대수롭지 않게 보이고, 여인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또 젊고 아름다운 여인을 보아도 결코 즐겁지가 않았다.
이들의 사랑은 결국 비련(悲戀)으로 끝났지만, 사랑의 고통을 통해 최고의 예술이
탄생했고, 또 도교로 승화돼 사랑의 전설로 지금까지 아릿하게 전해져 내려온다.
* 이 글은 저작권의 보호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