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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가 몸에게 답하다

아라홍련 2013. 4. 18. 02:11

 

 

 

 

 

                                                              影答形                                                

                                                       (그림자가 몸에게...)

 

                  存生不可言        생명을 지키는 것은 말할 것도 없고

               衞生毎苦拙        삶을 영위함도 매번 고통이지.

               誠願游崑華        진정 곤륜산과 화산에서 놀기를 원하지만

               邈然茲道絶        아득한 그 길은 끊어져 있네.

               與子相遇來        그대와 우연히 서로 만나 지금까지 왔지만

               未嘗異悲悅        슬픔과 기쁨을 달리 하지도 않았다.

               憩蔭若暫乖        그늘에서 쉴 때는 잠깐 벗어나지만

               止日終不別        날이 저물도록 끝내 헤어지지 않았네.

               此同既難常        이렇게 같이 있는 것도 늘 지속되기는 어려워

               黯爾倶時滅        캄캄해지면 모두 사라져간다.

               身沒名亦盡        몸이 사라지면 이름 역시 다하지.

               念之五情熱        이를 생각하면 모든 정이 뜨거워지네.

               立善有遺愛        선을 세우면 유애가 있을 것이니

               胡爲不自竭        어찌 스스로 최선을 다하지 않겠는가.

               酒云能消憂        술이 능히 우수를 없앤다고 하지만,

               方此詎不劣        이것과 비교하면 졸렬할 뿐.

 

                                                       ~* 도잠(陶潛, 도연명) *~

 

 

*  도연명(淵明, 365-427)

                                              

     중국 송대(宋代)의 대표적인 詩人.

     동진(東晉) 때 태어나 남조(男朝)의 송나라 초기에

     활동했던 詩人이다.

     이름은 (潛)이고, 字가 연명(淵明), 또는 원량(元亮)이다.

     집 앞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를 심고, 스스로 오류선생 

     (五柳先生)이라고 자호를 붙였다.

     담백한 詩風이 특징이다.

     위의 詩에서 곤화(崑華)란, 곤륜산과 화산을 뜻한다.

     신선이 노니는 산을 의미한다.

     또 오정(五情)은 眼耳鼻舌身의 오근(五根)에서 생기는

     욕망을 말한다.

     즉 기쁨(喜), 노여움(怒), 슬픔(哀), 즐거움(樂), 욕심

     (欲心)을 뜻한다.

 

     도연명은 29세에 벼슬길에 올랐으나 전원생활에 대한

     동경을 버리지 못했다.

     41세에 누이의 죽음을 구실 삼아 사임한 뒤, 다시는

     관계(官界)에 나가지 않고 은자(隱者)의 삶을 택했다.  

     이때 관직을 사임하면서 쓴 詩가 바로 그 유명한 귀거래사(歸去來辭)이다.

     이후, 향리의 전원에서 농사를 지으며 유유자적 살다가 63세에 생애를 마쳤다.   

     도연명의 詩는 사언체(四言體) 9수와, 오언체(五言體) 115수, 산문 11편이 전해진다.  

     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은 80여 수에 불과하다.

     도잠의 작품은 따스한 인간미와 고담(古談)의 기풍이 서려 있는 것이 특징이다.  

     모나지 않는 자연스러움과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경지는, 전원적인 삶에서 우러나는

     그의 맑고 따뜻한 심성의 산물이다.     

     소동파(蘇東坡)는 도잠의 詩를 이렇게 칭송했다.

 

          그의 시가 오래도록 주목받고 애송되는 까닭은, 고요하고 자연스러운

          읊조림과 멀리 세속의 티끌을 넘어서서 맑고 깊은 운치를 칭송하는

          선경(仙景)의 경지 때문이다. 

    

      술 좋아하기로는 도잠 또한 빠지지 않았다. 

      대단한 애주가였다.

      도연명은 술을 마시기 위해 관직에 나갔다고 귀거래사(歸去來辭)에서 이렇게 밝혔다.  

        "공전(公田)의 수확으로 족히 술을 빚어 마실 수 있어 팽택의 지방 관직을 얻었다."

      그는 음주(飮酒)라는 20수 연작시에서 술을 망우물(忘憂物)이라고 이름 붙였다.

      '근심을 잊게 하는 물건'이라는 뜻이다.

      조선시대에 담배를 망우초(忘憂草)라고 부른 것과 일맥상통한다.               

        

                                 一觴雖獨進, 杯盡壺自傾

             (잔 하나로 홀로 마시다 취하니, 빈 술단지와 더불어 쓰러진다.)

 

       한데 술을 마시면 정말 근심과 슬픔, 괴로움을 모두 잊을 수 있을까?

       깨어있는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술에 젖어 비몽사몽 간에 詩想이나 가다듬으며

       살면 모를 일...

       그러나 인간의 삶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는 데에 문제가 있지 않은가.    

       도잠의 詩 영답형(影答形)에 나오는 것처럼 "삶을 영위하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그래서 인생을 고해(苦海)라고도 한다. 

       어쩌면... 술 속에 숨어서 고통을 잊는 방법이야말로, 가장 손쉽게 인생을 살아가는

       방법인지도 모른다. 

       내가 애시당초 그런 방법을 사용하지 않은 이유이다.

       술에 젖어살던 그들도 하나같이 사바세계(娑婆世界)의 간난신고를 톡톡히 겪으며

       힘든 삶을 살다가 갔다.

       삶이란, 고통의 과정을 통해 영적인 발전을 이루어나가는 우주의 학교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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