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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보 詩, 곡강(曲江) 4

아라홍련 2013. 4. 16. 04:43

 

 

 

 

 

                                            곡강(曲江) 4 

 

 

            卽事非今亦非古      현실을 시로 읊으니 고금에 없는 시가 되었고
          長歌激越捎林莽      길게 읊는 격한 탄식에 숲과 잡초가 흔들리네.
          比屋豪華固難數     즐비한 호화주택들 헤아리기 어렵고,
          吾人甘作心似灰     차라리 마음을 타버린 재와 같이 묻어두리.
          弟姪何傷淚如雨     이웃들아, 눈물이 비오듯 상심할 것 없네.

 

               

                                                                                 ~* 두보(杜甫) *~

 

 

    *   두보가 이 詩를 지을 때쯤 당나라는 사치가 극심하고, 부정부패가 만연하며, 정치가

         극도로 혼란스러웠던 시기이다.

         곡강 연작시의 끝인 곡강(曲江) 4를 읽어보면, 두보는 이 때 곡강과 이별을 고하며

         장안을 떠나게 됐음을 알 수 있다. 

         착잡한 마음에 당시의 정치적 현실을 시로 읊으니, 고금에 없는 詩가 될 정도였다.

         민초들의 피폐한 삶과는 달리, 왕족과 부호들의 호화주택들이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즐비해 두보는 이를 개탄하고 있다.      

         그래서 그 울분이 일어난 마음을 '타버린 재와 같이 묻어둔다.'고 표현했다.

 

      "마음을 타버린 재같이 지니겠다."는 뜻의 心似灰  장자(莊子)에 나오는 말이다.  

         두보가 이 시를 지었던 758년은 '안녹산의 난'이 끝난지 불과 3년이 지나, 백성들의

         삶이 낭길에 매달려 있을 정도로 고초가 심하던 때였다.

         하지만 왕을 비롯해 왕족과 사회지도층은 극심한 사치를 부리고, 부조리가 만연해

         두보가 이를 詩로 읊다보니, 결국 고금(古今)에 없는 시가 됐다고 한탄하고 있다.    

         곡강에 앉아 세상에 대한 울분을 쏟아내다 보니 숲과 잡초가 다 흔들릴 정도였다.  

         풍류가 도저한 두보도 이제는 곡강을 떠날 수밖에 없게 된 것이다. 

 

         두보는 758년, 45세의 나이로 현종의 뒤를 이은 숙종(肅宗)의 좌습유(左拾遺)가 됐다. 

         좌습유는 종8품의 간관(諫官)이다.

         성품이 곧은 두보는 재상 방관(房琯)이 죄를 지어 파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간관의

         직무를 다해 "방관은 재능이 있어 재상감이며, 대신을 물리쳐서는 안 된다."는 상소를

         올렸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샀다.

         때문에 벼슬살이가 몹시 힘들었다.             

         이때, 시름과 울분 때문에 곡강에서 술을 많이 마시며 曲江을 주제로 한 연작시를 지었다. 

         결국 두보는 상소 건으로 처벌을 받게 되고, 화주(華州) 사공참군(司功參軍)으로 좌천된다.

         중앙 조직에 있다가 황제의 미움을 받아 지방으로 쫓겨난 것이다. 

         그 직전에 쓴 시가 바로 曲江 4이다.

 

         두보는 자신의 뜻과는 달리 벼슬살이가 여의치 않자 다음해인 759년, 사공참군 벼슬을

         사직한다.

         그리고 쓰촨성(四川省) 청두(成都)로 가서 청두 절도사 엄무(嚴武)의 후원으로 완화계

         (浣花溪)에다 초당을 지었다. 바로 완화초당(浣花草堂)이다.

         이후 5년 간, 두보는 일생 중 가장 행복하고 평온한 시간을 보낸다. 

         '엄무'의 막료로 공부원외랑(工部員外郞)의 벼슬을 지냈기 때문에, 두공부(杜工部)로

         불리게 되었다.

         허나 이도 오래가지 않았다.           

         후원자 격인 '엄무'가 죽자, 54세인 두보는 정처없이 방랑길을 떠난다.

         양쯔강을 하행하여 쓰촨성 동단의 쿠이저우(夔州)  협곡에 이르러 2년 간을 체류한 후,

         후베이, 후난의 수상(水上)에서 계속 방랑생활을 했다.

         결국 배 안에서 병을 얻어 둥팅호(洞庭湖)에서 770년, 59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중국의 시인이자 희곡가이며, 정치가였던 궈모뤄(郭沫若)는 그의 저서 <이백과 두보>에서

         두보의 삶의 끝을 이렇게 기록했다. 

 

                 술취한 李白이 강물 위에 비친 달을 건지려다 죽었다는 전설은 거짓이지만,

                 가 상한 쇠고기를 먹은 뒤 술을 마셔 독이 빨리 퍼져 죽은 것은 사실이다.   

 

         두보는 왜 시성(詩聖)으로 불리우는가?

         바로 인간에 대한 위대한 성실성 때문이다.

         성실함이 낳은 우수(憂愁)를 바탕으로, 일상생활에서 詩才를 많이 따서 인간의 심리와

         자연의 사실 등 새로운 감동을 찾아내어 시를 지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섬세한 표현에 심혈을 기울였다.

         특히 고체시(古體詩)에서 사회성을 많이 발휘했으므로 두보의 시를 '시로 표현된 역사',

         즉 시사(詩史)라고도 부른다.

         그래서 중국인들은 두보를 詩의 聖人이자, 위대한 민중시인으로 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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