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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의 여인들...

아라홍련 2013. 4. 10. 03:27

 

 

 

 

  제발 드라마와 역사를 혼동하지 말자.

  드라마는 그냥 드라마로만 보자.

 

  드라마를 역사로 이해해서도 안되고, 드라마가 역사와 다르다고 열을 내서도 안된다.

  작가와 작품에 따라 팩트를 중시한 드라마가 있고, 팩트와 전혀 상관없이 만드는 드라마가 

  있으며, 역사공부를 제대로 안한 작가가 역사를 자기 마음대로 바꾸어 왜곡하는 경우도 있다.

  때문에 드라마는 드라마일 뿐이다.

  드라마가 역사와 다르다고 침을 튀기며 흥분해서는 안된다.

  또 드라마와 역사를 혼동해서도 안 된다. 

 

  장옥정은 숙종의 첫사랑이 아니다.

  인현왕후 또한 숙종의 첫 부인이 아니다.

  영조의 생모인 숙빈 최씨는 성인이 돼서 궁궐에 드나들며 무수리 일을 한 게 아니라,

  8살의 어린 나이로 숙종의 여인들 중 가장 먼저 입궁했던 인물이다.

  역사 드라마를 볼 때는 적어도 이런 기본적인 상식 정도는 알고 보도록 하자.

  그래야 역사와 드라마를 혼동하지 않는다. 

  또 숙종... 하면, 장옥정과 인현왕후, 최숙빈만 생각해서도 안된다.

 

  그렇다면 숙종의 첫 번째 부인은 누구일까?

  바로 인경왕후 김씨이다.

  광산 김씨인 김만기의 딸인 그녀는 1670년 10세 때 세자빈으로 간택됐고, 이듬해 3월에

  왕세자빈으로 책봉됐다.  

  김만기는 국문 장편소설 '구운몽(九雲夢)'을 쓴 서포 김만중의 형이다.

  즉, 인경왕후 김씨는 김만중의 조카이다.

  1674년 현종이 죽고 숙종이 조선 제 19대 왕으로 즉위했지만, 14살의 어린 나이인지라

  2년 후인 1676년에야 정식으로 왕비에 책봉됐다.

  하지만 4년 후에 천연두 증세를 보이며 심한 열병에 시달리다 발병 8일만에 2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떴다. 

  소생으로 2명의 공주가 있었으나 모두 조졸(早卒)했다.    


  숙종이 즉위한 1674년은 남인(南人)이 정권을 잡은 해였다.

  한데, 인경왕후가 세상을 뜬 1680년엔 서인(西人)경신환국으로 권력을 장악했다. 

  숙종의 두 번째 부인인 인현왕후 민씨는 서인 출신으로 1681년에 숙종의 계비가 됐다.

  그녀는 숙종과의 사이에 소생이 없었다.

  그런 때, 남인을 등에 업은 후궁이던 소의 장씨(장옥정)가 아들을 낳아 왕비의 입지가

  한층 좁아졌다. 

  장옥정은 곧 정1品 장희빈으로 격상되었다. 

  인현왕후가 왕비로 있을 당시, 당쟁이 심해 숙종이 여러차례 국면을 전환하며 환국정치

  (換局政治)를 구사하는 바람에 누구보다 마음고생을 많이 했다.  

  서인 출신이었던 인현왕후는 서인들의 운명에 따라 폐위와 복위를 반복하는 불운한

  왕비로 살다갔다.

 

  서인인 인현왕후가 왕비가 된지 8년 만인 1689년,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장악하자 숙종은

  바로 그 해에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사가로 내쫓은 후, 이듬해에 장희빈을 왕비로

  책봉했다. 

  바로 숙종의 세 번째 부인이다.

  그리고 3살 짜리 원자를 세자(경종)로 책봉했다.

  이에 노론은 적극 반대의사를 표하며 반발했다.

  특히 노론의 영수인 송시열은 이를 강하게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격분한 숙종은 조선왕조실록에 무려 3,000번이나 등장하는 대학자이자 문신인

  83세의 노신 송시열을 사사했다.

  우암(尤庵)은 전국 42개의 서원에 배향될 정도로 역사적으로 비중이 큰 인물이었다.

  그러나 숙종의 변덕스런 사랑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무수리 최씨가 아들(영조)을 낳고, 1694년 갑술환국으로 서인이 다시 집권하자 

  숙종은 이번엔 왕비인 장옥정을 다시 후궁으로 격하시키고, 인현왕후를 다시 왕비로

  복귀시켰다.

  만고풍상에 시달린 인현왕후가 죽자 숙종은 이번엔 장희빈을 아예 제거해버렸다.

 

  숙종의 네 번째 부인은 경주 김씨인 인원왕후 김씨이다.

  1701년, 여러 번의 환국으로 만신창이가 된 인현왕후 민씨가 죽자, 다음해에 16세의

  나이로 왕비로 책봉됐다.

  인원왕후도 25세 때 천연두를 앓았지만, 다행히 회복됐다.

  한데, 인원왕후 또한 소생이 없었다.

  1720년 숙종이 죽은 뒤 왕대비에 올랐고, 1724년 경종이 죽고 영조가 왕위에 오르자

  대왕대비가 됐다.

  향년 71세로 숙종의 부인들 중 가장 장수했다.

 

  그렇다면 숙종에겐 4명의 부인말고도 몇 명의 후궁 있었을까?

 

  첫번 째, 숙빈 최씨가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비천한 무수리 출신인지라 영조에겐 모성에 대한 애틋함과 함께

  컴플렉스가 엄청났다.

  영조의 강건한 체질은 생모로부터 물려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설에 승은을 입기 전, 출퇴근을 하며 무수리로 궁궐 일을 돌본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사실은 다르다.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이 영광 군수로 발령을 받아 내려가던 길에 어린 그녀를

   알게 돼, 다시 한양으로 돌아올 때 데리고 와 8세 때 입궐시켰다.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 세력이 경종의 붕어 후, 영조가 즉위하자 왕의 생모인 최숙빈이

  숙종을 만나기 전에 다른 남자와 혼인했었고 자식까지 있었다고 영조를 폄하하는 소문을

  낸 것은 한마디로 공작정치의 일환일 뿐이다.

  숙종과의 사이에 영수(영조) 전에 낳은 조졸한 아들이 한 명 더 있다.

 

  두 번째, 명빈 박씨가 있다.

  숙종의 서2남인 연령군의 어머니이다.

  후궁이 된 뒤에 귀인에 임명됐다가 1702년 빈(嬪)으로 승격했다.

  하지만 이듬해에 생을 마감했다.

 

  세 번째, 영빈 김씨가 있다.

  안동 김씨인 명문가 '김창국'의 딸로 숙종이 매우 총애했던 후궁이다.

  당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려 한때 인현왕후를 돕다가 서인 세력이 몰락할 때 함께 폐출됐다.

  하지만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다시 재입궐해 왕의 총애를 받았다.

  숙종과의 사이에 소생은 두지 못했다.

  대신, 연잉군(영조)를 친아들처럼 여기고 키우며, 왕이 되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연잉군을 자주 불러 음식도 주고, 업어주기도 하는 등 자애로움으로 대하자 연잉군은

  영빈 김씨를 "어머니!"라고 부르며 친어머니처럼 따랐다. 

  1735년(영조 11년), 영빈 김씨가 향년 67세로 세상을 뜨자 영조는 몹시 슬퍼했다.

  이후 그녀의 재실을 자주 찾으며 애도(哀悼)했다.

 

  그밖에 귀인 김씨소의 유씨가 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이 두 명의 후궁에 대해서는 참고할만한 기록물이 없다.

  공식적으로 숙종의 왕비와 후궁은 모두 9명이다.     

 

  ..... 이상, 왕비였던 4명의 여인과 5명의 후궁 등 '숙종의 여인' 9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숙종의 여인들 사연만으로도 숙종이라는 왕의 성품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왕에게 여인보다, 사랑보다, 소중했던 건 오직 권력이었다.

  권력 때문에, 정권 때문에, 정치 때문에, 한때 사랑했던 여인들을 환국정치를 빌미로

  내쫓고, 다시 들이고, 또 죽였다.

  이런 행동은 어느 시대이건, 그 어떤 왕도 하지 않았던 짓이다.

  단순히 정치나 권력 때문이라고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결코 아니다.

  숙종의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성품이 매우 변덕스럽고, 여인들에게 싫증을 자주 내며, 

  성격이 매우 민감하고, 또 연하지벽(煙霞之癖)이 있었으며, 감정이 극단적으로 오간

  것을 알 수 있다.

  정치적으로 숙종을 어떻게 평가하건 간에 한 지아비로서, 한 사내로서, 비정한 냉혈한

  (冷血漢) 임에는 틀림없어 보인다. 

  그래서 대신들이 정한 그의 묘호(廟號, 사당의 칭호)도 강덕극취(剛德克就)이다.

  '강직하고, 덕스럽고, 이겨내며, 나아간다.'는 뜻이다.

  정치의 주도권을 잡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서는 사랑도, 여인도, 다 정치의 소모품으로

  생각하고 이겨내며 나아간 왕... 그가 바로 숙종이란 임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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