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의훤이란 인물은 역사 어디쯤에서 나타나는 인물일까?
대대로 왕이 부럽지 않을 정도의 큰 부자였던 전라도 해남의 고산 윤선도 종가에
딸렸던 사람들의 분재기(分財記), 즉 재산상속문서에 나오는 사람들 중 한 명이다.
'박의훤'의 분재기 작성 당시, 분재의 총량은 노비 7명과 논밭 223마지기였다.
양인치고는 매우 부유한 층에 속했다.
양인(良人)은 평민(平民)을 뜻한다.
조선시대에는 양반, 중인, 양인, 천민으로 신분이 나뉘어져 있었다.
'박의훤'의 인적사항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고,16세기~17세기 초의 인물이라는
것만 알려져 있다.
그의 이름이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1602년(선조 35년), 5명의 생존 자식과 2명의 죽은
자식에게 재산을 나누어 줄 때 작성한 분재기에다가 자신의 파란만장한 애정사를
구구절절 기록해놓았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눈물없이는 볼 수 없는 애절한 가정사이다.
그가 분재기에 가족사를 상세히 늘어놓은 것은, 자식들에게 막상 재산을 물려주려
하니 그동안 그를 스쳐간 5명의 부인과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 대해 만감이 교차했기
때문이다.
첫번 째 처부터 네번 째 처까지는 자식을 낳고도 남의 남자나 노비와 통간, 상간,
잠간, 화간을 하다가 모두 그의 곁을 떠나가버렸다.
전부인들이 '박의훤'에게 준 상처는 너무 깊어서 그는 분재기에서 "흘린 눈물이
한말이 넘는다."고 표현했다.
그리고 전부인들의 이름도 모두 공개했다.
은화... 진대... 몽지...가질금... 여배...
그는 다섯번 째 처인 '여배'만이 40여 년 동안 자신과 함께 살았다고 회고했다.
그렇다면 전부인들과 헤어진 이유인 통간, 상간, 잠간, 화간은 무엇을 뜻할까?
통간(通姦)과 상간(相姦)은 의례를 거치지 않고 성적 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잠간은 남녀가 자신의 신분이나 권력을 이용하여 간통하는 행위를 말한다.
전부인 중 한 명이 주인이라는 권력을 이용해 노비와 통정을 하는 바람에 결국
헤어지게 됐다는 뜻이다.
화간(和姦)은 잘 알려진대로 쌍방이 동의하여 성관계를 맺는 것을 말한다.
이쯤 되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조선시대의 정조관념에 슬그머니 의문이
생긴다.
아무리 양인이라지만 남편도 있고 애까지 낳은 부녀자들이 뭇 사내들과 거리낌
없이 통정을 하고, 이로 인해 박의훤은 아내 4명과 헤어지게 됐으니 막상 그들이
낳은 자식들에게 재산을 나누어주기 위해 분재기를 작성하려는 순간, 만감이 교차
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그야말로 오늘날에도 보기 힘든 가족사이다.
하지만 회상에만 그치지 않고, 분재기에 자신의 애정사를 시시콜콜 적나라하게
기록해놓은 '박의훤'의 행동을 용기라고 해야 할지, 분풀이라고 생각해야 할지
잘 모르겠다.
이 분재기 때문에,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은 수백 년, 또는 수천 년 전에도
똑같이 일어났었다는 사실이 다시 한 번 증명된 셈이다.
한데, 더 희한한 일은 '박의훤' 또한 5명의 아내와 단 한 번도 혼례를 올리지 않고
그냥 살았다는 사실이다.
사실상 난혼(亂婚)이다.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이념이 전 신분, 전 지역에 확산되지 않아 양인이나 천민들은
혼례식을 올리지 않고 관행적으로 그냥 결혼생활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때문에 간통사건이 많고, 정조관념도 희박했던 것으로 추정된다.
19세기 영국의 저명한 정치가였던 '조오지 커즌'이 1894년 중국과 조선, 일본을
방문하고 쓴 책인 <백년 전의 여행, 백년 후의 교훈>에는 이런 기록이 있다.
조선의 귀족여인들의 정조관념은 지나치게 엄격하여 얼굴 보기도
힘들지만, 90% 이상의 일반 평민이나 하층민들은 오늘 19번째
남편이 죽으면 바로 20번째 남편을 맞이할 정도로 천박하다.
참 떨떠름한 내용이다.
아무튼 '박의훤'은 평민임에도 불구하고, 분재기에다 자신의 파란만장한 애정사를
줄줄이 기록해놓는 바람에, 웬만한 양반이나 중인들보다도 더 역사의 관심을 받는
인물이 됐다.
* 이 글은 저작권의 보호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