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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미양요 질문에 답하기

아라홍련 2013. 3. 26. 00:49

 

 

신미양요(辛未洋擾)에 관한 블로그 글을 읽고 몇 가지 질문을 한 독자들이 있어, 바쁜 와중에

답글을 올린다.

전쟁이 일어났을 경우, 전적이나 피해에 대해서는 교전 당사자 국가들 간의 통계가 각각 다르다.

당연히 승리한 국가에서는 전과를 부풀리려 애쓰고, 피해국은 당연히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게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서로의 통계가 다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양쪽의 기록들을 균형있게 잘 살펴보는 게 중요하다.

역사란, 입에 거품을 물고 혼자 자신의 주장이 맞다고 열을 열린다고 해서 인정받는 게 아니다.

꼼꼼히 사료를 찾아보고 균형있게 잘 판단하는 것이 중요하다.

  

 

 1. 신미양요 때 조선군의 전사자는 몇 명이었는가?

 

      여기에 대한 기록들도 천차만별이다.

      우리나라에는 350명이 전사했다고 알려져 있다.

      하지만, Daum 백과사전을 보면 피해를 최소화한 정도가 아니라 거의 역사 조작에 가깝다. 

       

           조선측은 어재연과 그의 동생 어재순(魚在淳) 등 53명이 전사하고,

           강화부 별무사 유예준(劉禮俊) 등 24명의 군인들이 부상을 입었으며,

           미군은 전사자 3명, 부상자 10명을 내었다.

 

       이건 줄여도 너무 줄였다.  

       이런다고 뭐가 달라지나?

       나는 백과사전에 틀리게 나온 것들을 찾은 내용 만으로도 책을 한 권 쓸 수 있을 정도이다. 

       보통 조선군 전사자는 350명 정도로 본다.

       한데, 미군측 기록은 다르다. 

       미국의 전쟁사(戰爭史)에서는 신미양요를 <48시간 전쟁>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 책에는 광성진 전투에서 조선군 430명이 전사하고, 부상당한 포로가 20명이 잡혔다고 

       기록돼 있다.

       전사자에는 광성진 전투의 부지휘관인 진무중군(鎭撫中軍) 어재연(魚在淵)도 포함돼 있다.

       군직(軍職)에 있던 어재연 장군의 동생 어재순(魚在淳)도 백의종군했다가 형제가 전사했다.

       미군과 조선군의 통계가 다르므로 조선군 전사자의 확실한 숫자는 알 수 없다.

       대충 350명 정도로 보고 있다. 

       앞서 말했듯 승전국에서는 전과를 부풀리려 하고, 패전국에서는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군 전사자를 수십 명으로 줄여버린 <백과사전>을 봐도 증명이 되는 부분이다.

 

 

2.  수자기(帥字旗)가 왜 그렇게 중요한가?

 

     아수라장인 전쟁터에서는 호령도 통하지 않고 고함도 들리지 않는다.

      때문에 동서고금의 모든 전쟁에서 지휘관은 북이나 나팔, 깃발을 사용해 휘하의 부대를

      지휘했다. 

      이몽에서도 비상사태발생 시, 취라취가 북소리을 내거나 나각 소리를 내 변고가 있음을 

      알리고, 당직을 서던 군사들의 비상소집을 알리던 것을 기억할 것이다.   

      하지만, 피를 튀기는 전쟁터에서는 해당되지 않는다.

      그래서 지휘관들은 깃발을 가지고 부대를 지휘한다.   

      때문에 전쟁에서는 절대로 깃발을 뺏기면 안 된다.

      만에 하나, 적이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깃발을 이용하면 아군이 전멸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앞서 블로그에 올린 글인 <경칩의 풍속>을 다시 한번 읽어보라!

       

      왕실에서는 경칩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에 소사(小祀)로 규정된 <둑제(祭)>

      지냈다즉 군대를 출동시킬 때 군령권(軍令權)을 상징하는 (군기,軍旗)에다가 제사를

      지낸 것이다.  '둑(纛)'이란... 군대에서 대장이 지휘할 때 사용하는 깃발을 말한다.

      둑제는 경칩인 음력 2월과 상강일(霜降日)인 음력 9월, 이렇게 일년에 두 번 병조판서가

      주관해 제사를 지냈다. 

 

      이제 연결이 되는가?

      (군기)은 곧 조선의 병권을 말한다.

      전쟁터에서는 국가를 상징한다.

      그래서 국방부장관격인  병조판서가 왕을 대신해 군기인 둑에다가 일년에 두 번씩 제사를

      지냈다. 국가제사로 지정돼 있을 정도로 중요한 제사이다. 

      군기(軍旗)는 조선의 상징이자 조선군의 혼(魂)이다. 

      '군기'는 한마디로, 절대적인 지휘권을 상징한다.

      때문에 서양의 여러 군대에서는 아직도 부대원들이 군기에 입을 맞춤으로써 충성을 서약한다.

      광성진을 함락시킨 미군이 제일 먼저 한 일도, 수자기가 올라있던 곳에 성조기를 올린 일이다.

      특히 조선의 수자기(帥字旗)는, 전투 현장에서 지휘부를 상징하던 깃발이다.   

      깃발 한가운데 '장수'을 뜻하는 한자인 '수(帥)'자가 적혀 있는 수자기는 조선 후기, 중앙의 

      독립 군영이나 지방 군사조직의 총지휘관이 있는 본영(本營)에 꽂았던 깃발이다.

      신미양요 때는 고종의 왕명으로 진무영(鎭撫營)의 부지휘관인 중군(中軍)으로 임명된 어재연

     (魚在淵) 장군이 진무사의 명으로 광성보를 본진으로 하여 이 수자기를 걸고 싸웠다.

      당시, 총지휘관인 진무사(鎭撫使)는 어영대장과 훈련대장을 역임한 정기원(鄭岐源)이었고,

      강화 판관은 이창회(李昌會)였다.  

      당시 미군측의 기록을 보면, 조선군이 수자기를 뺏기지 않으려고 끝까지 처절하게 몸부림쳤던 

      정황이 엿보인다.          

 

       "포대에 꽂혀있던 수자기를 조선군 포수 네댓 명이 몸으로 꽁꽁 묶어 지키고 있었다."

 

      수자기를 뺏기면 공식적으로 조선이 전투에 진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미 해군이 수자기를 전리품으로 가져가 자랑스럽게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전시한

      것이다.   

      그리고 수자기는 우리나라에 단 하나밖에 남아있지 않은 희귀하고 소중한 유물이기도 하다.

 

 

3. 미국은 왜 수자기를 그냥 돌려주지 않고, 장기임대 형식으로 한국에 빌려주었을까?

 

    문화재청은 애초 수자기의 영구 반환을 추진했다.

     그러나 미국 해군사관학교에서 난색을 표했다.

     수자기가 전리품이었기 때문이다.

     미국법 상, 전리품의 반환은 법의 개정 및 의회와 대통령의 승인이 필요하다.

     절차도 복잡하지만, 시간도 많이 걸린다.

     때문에 사실상 돌려주는 것이지만, 그 명분을 "장기임대'의 형식으로 돌려준 것이다. 

     프랑스에서 의궤를 돌려준 방식과 같은 맥락이다. 

     미국 해군사관학교에는 수자기 외에도 조선군의 깃발 수십 점, 대소구경 화포 2백 여 문을

     보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4.  신미양요 당시, 포수들은 누구였을까?

 

      미군측 기록에도 나오지만, 그들은 수자기를 뺏기지 않으려고 네댓 명이 수자기로 몸을

      꽁꽁 묶어 끝까지 처절하게 저항했다.

      그리고 미군은 그들을 정확히 <포수(砲手)>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조선의 강화도 수비군... 그들은 누구였을까?

      신미양요 당시 강화도수비 조선군은 평안도와 함경도에서 차출된 '범' 포수들이었다.

      즉, 백두산 범 포수들은 임진왜란 때 도입된 하잘것없는 화승총(조총)으로, 당시의 첨단

      무기로 중무장한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자들의 침략전쟁에 대항해 목숨을 걸고 싸웠다. 

      미군들은 작전일지에서 이들을 Tiger Hunter라는 용어로 기록했다.  

      조선군의 용맹함을 전 세계에 널리 알린 단어이기도 하다.

      첨단 무기로 무장한 미군들도 범 포수들의 눈빛과 용맹한 기개에는 간담이 서늘해졌다.

      그래서 전투에서 승리하고도, 참전 군인과 종군기자들이 그렇게 조선군의 용맹함을

      극찬했던 것이다.

      신미양요에서 승리한 후, 한미수호조약을 맺는데 무려 9년이란 세월이 흐른 것만 보아도

      조선군의 기개와 저항정신은 미국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는 것을 알 수 있다.

     

 

5.  신미양요는 그냥 패배의 역사일 뿐인가?

 

     당시 서구 열강들은 최첨단 무기로 무장한 채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식미지화를 획책했다.

      그리고 이에 대항했던 아시아제국은 하나같이 굴복했다.

      조선만 패한 것이 아니다.  

      일본과 중국 등 아시아의 거의 모든 나라가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침략을 당했고, 강제로

      불평등조약을 맺은 뒤 개항의 과정을 거쳤다. 

      때문에 당시의 역사를 그저 "비참한 역사"로 폄하하고 치부하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미국과의 전쟁은 화력 면에서 애시당초 전투상대가 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미국 해병대는 전날 초진진을 함락시킨 뒤, 함포사격을 앞세워 압도적인 화력으로 수륙

      양방면에서 포격을 가했다.     

      미군은, 산업혁명을 거치며 지속적인 개량을 통해 상당히 현대화를 이룬 레밍턴 라이플

      (Remington Rifle)을 장비하고 있었다.

      화포 또한 포탄이 가지는 물리적인 충격뿐만 아니라, 포탄 속 화약의 작용으로 인해 목표에

      도달할 때 엄청난 폭발력과 함께, 파편에 의한 살상이 가능할 정도로 급진적인 발전을 했다.      

      그럼에도 노후한 조총으로 무장한 조선군은 목숨을 다해 용감하게 끝까지 싸웠다.

      부상자 20여 명을 빼고는 전멸했다.

      당시, 미국 해군 참전 지휘관들의 말과 종군기자가 쓴 미국의 신문기사들을 인용하면서 

      독자들의 질문에 대한 답글을 마치고자 한다.

 

    * "조선군은 근대적인 무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한 전근대적인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해 용감히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강력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슐레이 大領)  

 

    * "조선군은 용감했다. 그들은 항복 같은 건 아예 몰랐다.

        무기를 잃은 자들은 돌과 흙을 집어 던졌다.

        전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자, 살아남은 조선군 1백여 명은 포대 언덕을 내려가

        한강물에 투신 자살했고, 일부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앨버트 가스텔)

   * 
"남북 전쟁때에도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포화와 총알이 쏟아진 적은 없었다."

        (블레이크 中領)

   * "이 전투는 동양에서 미국 해군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외교의 실책을 폭로한 최고의

        사건이다" (국무장관, 포스터)
  

   * "조선군은 수자기를 뺏기지 않으려고 포수 네댓 명이 수자기로 몸을 꽁꽁 묶어 끝까지

       처절하게 저항했다. (미군 기록)

 

 

    정말 눈물겹지 않은가...

    전쟁의 승패를 떠나 조선군은 성스러운 투쟁에서 자국의 안전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웠고, 끝까지 적에게 무릎을 꿇지 않았다. 

    이는 정신적인 승리를 의미한다. 

    신미양요 이후, 서구사회에서 "조선은 중국이나 일본처럼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강인한

    정신력(spirit)를 가진 나라"라고 높이 평가했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다. 

 

 

   *  이 글은 저작권의 보호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