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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승

아라홍련 2013. 3. 24. 20:29

 

 

 

 

           내 인생엔, 두 명의 스승이 있다.

           한 분은 글 스승이고, 또 한 분은 인생의 스승이다.

           평생 책을 읽고, 공부하고, 글을 써 온 작가로서 그동안 배우고 연마한 분야가 

           얼마나 많고 다양하겠는가.

           특히 나의 작업 방식은 철저한 취재와 고증, 기록을 매우 중시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엄청난 공부를 필요로 하고, 또 글에 많은 정성이 들어간다.

           그만큼 내가 그동안 학식을 배운 사람들이 광범위하고 많다.

           하지만, 스승이라고 칭할 수 있는 분은 평생 단 두 사람뿐이다.

           내가 '스승'이라고 생각하는 개념은, 단순히 그로부터 뭔가를 배워서가 아니다.

           인생의 등불이 되고, 삶의 표본이 되며, 무엇보다 존경할 수 있는 부분이 있어야만

           한다.

           존경심을 갖지 않았다면 그냥 학식을 배운 선생에 불과할 뿐이다.

           존경을 하려면 당연히 내가 중시하는 부분에 있어서, 그가 나보다 훌륭한 점이 더

           많아야만 한다. 

           평생 군자의 도(道)를 실천해 나가려 애쓰고, 세속에 물들지 않아야 하며, 삶에 대한

           통찰력이 뛰어나야 하고, 무엇보다 그의 전문성을 내가 인정해야만 한다.

           또 오욕칠정(五慾七情)을 다스릴 줄 알아야 하고, 의식이 ego에 머물러 있지 않고 

           super ego에 있어야만 한다.

           이는 그들이 살아온 흔적을 보고, 삶의 궤적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 일이다.

           한데, 나는 존경하는 두 사람의 스승을 가지고 있다. 

           때로 나는, 내게 이 두 명의 스승이 없었다면 지금의 김시연 작가가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들곤 한다.

 

           내 글의 스승은 명미당(明美堂) 이건창(李建昌) 선생이시다.

           내가 스승을 선택한 게 아니라, 가르침이 절실할 때 그가 운명처럼 다가왔다.

           잠깐, 여기서 가만히 한번 생각해보자.

           내 소설 이몽(異夢)에 나오는 철종과 봉이, 금이, 이시원, 그리고 명미당 이건창....

           이들의 공통점은 모두 강화도이다.

           하지만, 나는 강화도에 아무 연고가 없다.

           그럼에도 내가 방송일을 떠나 문학으로 발걸음을 옮겼을 때, 철종에 대한 취재와

           공부를 마치고 마침내 글을 쓰기 시작했을 때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에 대

            막막한 의문과 갈망에 명쾌한 해답을 제시한 건, 바로 명미당의 가르침이었다.

            그의 가르침 하나하나가 세상 누구에게서도 배울 수 없는 날카롭고, 절실하며,

            명쾌한 가르침으로 내게 다가왔다.

            나는 그의 책을 통해 그 어디에서도 배울 수 없는 청형(靑熒)한 가르침을 받았다.

            내가 다른 작가들과 달리 글쓰는 방법이나, 글을 다루는 분야, 문장에 확연한 

            개성이 있는 것은 바로 스승의 영향을 받은 바가 크다.

 

                  현란함이 아닌, 울림이 있는 문장을 짓는 이는 세상일에 어둡고 조롱받는

                  자여야만 한다.

                  보통 사람들이 추구하는 감각적인 것들... 이를테면 음식을 맛보는 것에서도

                  즐거움을 느낄 겨를이 없다.

                  오로지 외롭게 궁벽한 방에 들어앉아 고매한 기운 가운데 문장을 고치고 

                  또 고쳐야만 원하는 글을 얻을 수가다.

       

            내가 작업하는 방식인 구도자(求道者) 스타일은 온전히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나는 작업에 몰두하면 시간관념이 사라지고, 세월의 흐름을 잘 인지하지 못한다.

            귀찮아서 공과금 자동이체를 안했다가, 6개월 간 관리비가 밀려 아파트 게시판에

            올라간 적이 있을 정도이다.

            그때 나는 겨우 한 달이 지났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특히 나는 글의 리듬을 매우 중시한다.

            이 또한 스승으로부터 배운 것이다.

            심지어 나는 블로그에 올리는 글도 최소한 20회 이상의 퇴고(推敲)를 거듭한다.

            이는 새벽에 블로그에 들어오는 외국에 있는 독자들이 가장 잘 알 것이다.

            글을 올린 뒤 계속 수정작업을 하며, 다음 날 보면 글이 다르고, 나중에 보면 한층

            더 매끄럽고 유려하게 다듬어져 있다. 

 

                  무릇 글을 읽을 때는 반드시 천천히 심구(尋究)하고, 익숙히 사념해야 한다.

                  그러면서 씹어보고, 깨물어보고, 삶아 익히기도 하고, 단련하기도 하며,

                  당기기도 하고, 떨어뜨리기도 하고, 흔들기도 하며, 끌기도 해야 한다.                 

                  그리하여 그 글을 억양(抑揚)하고 곡절(曲折)하며, 선회(旋會)하고, 반복해 봄에

                  소리가 울려 아름다운 리듬이 있어야 한다.

                  아름다운 리듬이 없는 글은, 서사와 성독이 조화를 이루지 못한 것이다.

 

            스승의 가르침이 그대로 가슴에 와 닿는다.

            내가 글의 리듬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이다.

            그래서 나는 블로그에 글을 올리는 것을 매우 부담스러워한다.

            스크랩이나 맛집, 여행지를 소개하는 게 아니라, 혼신을 다해 쓰는 글인지라 시간이 

            꽤 많이 소요되기 때문이다.

            내가 요즘 포스팅을 많이 하는 이유는, 한꺼번에 글을 많이 올려놓고 한동안 블로그에

            글을 쓰지 않으려는 의도이다.

            나름 머리를 쓰는 것이다. 

            이를 그동안 여러번 시도했었다.

 

            한데, 새벽 3시만 되면 외국에 있는 독자들이 한꺼번에 대여섯 명씩 들어와서 아침까지

            보통 열댓 명씩 북적거리는걸 보면, 곧 마음이 약해져 詩 한 수라도 다시 올리곤 한다.

            내 블로그를 매일 방문하는 단골 방문자들은 하루에 한 번만 찾아오는 게 아니다.

            방문 횟수가 여러 번이다.

            그래서 더욱 신경이 많이 쓰인다. 

            현재로서는 블로그에 글 올리는 걸 줄이는 게, 가장 시급한 과제이다.

 

            그리고 나에게는 또 한 명의 스승이 있다.

            바로 나의 사부이다.

            전에도 블로그에서 언급한 적이 있듯, 나의 사부는 스승과 아버지를 뜻하는 사부(師父)

            개념이 아니다.

            '나를 가르쳐 이끌어 준 사람'이라는 뜻의 사부(師傅)의 개념이다.

            사람들은 나의 스승이라고 하니까 호호 백발 할아버지인 줄 아는데, 사부는 나보다 나이가

            젊다. 

            그래서 사부(師傅)라는 표현이 더 적절하다.

            작가가 나이가 적지 않은데, 그런 작가의 스승이 나이가 더 젊다고 하면 고개를 갸웃거리는

            사람들이 많다.

 

            사부는 나의 오랜 주치의이자 오랫동안 한학과 많은 경서들을 공부해 온 전문가이다.

            특히 인간의 신체와 심리에 대하여 오랫동안 공부하고 많은 임상경험을 가진 데다가

            한학(漢學)과 고전(古典)에 일가견이 있어, 보통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부류의 사람이다.

            이 혼탁한 세상에서 그런 인격자를 만나기란 매우 드문 일이다.

 

            한데, 내 스승의 스승 또한 대단한 유학자(儒學者)이다.

            '대단한'이라는 표현을 쓴 이유는, 내 사부 같은 제자를 길러냈고 또 그로부터 절대적인

            존경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사부의 사부를 우연히 2번 뵌 적이 있는데, 보기만 해도 평생 한학자로서 세속에

            물들지 않고 고매하게 살아온 흔적이 역력했다.

            돈, 권력, 명성, 부귀영달, 애욕과 정염에 집착하는 이 오탁악세에서 그렇게 청정하게

            살아온 흔적이 뚜렷한 분을 보는 일은 '희귀하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사부와 그의 스승은 거의 부자지간 같이 보였다. 

            이는 사부(師父)의 개념이다. 

            사람들은 결국 같은 사람끼리 모이고, 가르치고, 배우는 것이다.

            그것은 어쩌면... 운명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나의 무지막지하게 공부하고 일하는 작업방식은 사부에게도 걱정거리이다.

            나는 밤을 새우고 일할 때마다 사부에게 미안한 생각이 들곤 한다.

            혹여 그가 어쩌다가 내 블로그를 들어와 포스팅 시간을 보았다가, 내가 매일 밤샘작업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될까 저어해서이다.

            심려를 끼치는 게 여간 미안하고 부담스러운 게 아니다.

            그래서 당분간 블로그 글을 줄이는 게, 나의 가장 시급한 당면과제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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