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군함 콜로라도호(USS COLORADO, 1856~1886)>
<1871,6. 신미양요 콜로라도호 선상의 조선관리인 문정관>
* 문정관(問情官)이란... 외국의 배가 처음으로 항구에 들어왔을 때나, 외국의 배가 표류하여
왔을 때 그 사정을 알아보는 일 따위를 맡아하던 임시 벼슬아치를 말한다.
조선 후기부터 대한제국 때까지 있었다.
<콜로라도호 작전회의>
<로저스 미 해군 제독과 그 수행원들>
<로저스의 작전회의, 1871년 5월. 두 명의 중국인이 보이는데, 아마도 안내자나
통역관으로 추정된다.>
<강화도 초지진에 상륙한 미 해병대. 뒤에 이들은 광성진에서 조선군과 백병전을
벌인다.>
<초지진 포대를 점령한 미 해병. 초지진을 점령한 부대는 킴벌레이 중령 이하의
장병들이며, 그 수는 약 450명이었다.>
<강화도 덕진진을 점령한 미군들, 1871년 6월 2일>
<1871년 6월, 전쟁이 끝난 후 미국 군함 콜로라도(USS COLORADO, 856~1886)호
장교들이 선상 위에서 기념촬영을 한 사진>
<미국 군함 콜로라도호의 위병하사 Charles Brown 이 Mckabe Tilton 대령과 함께
선상 위에 있는 장면을 찍은 사진. 뒤에 있는 깃발은 강화도에서 약탈한 어재연 장군의
장수기인 수자기(帥字旗)이다. >
<136년 만에 미국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조선의 혼 어재연(魚在淵) 장군의 장수기>
* 신미양요(辛未洋擾)란?
'신미양요'란 강화도에서 일어났던 한국과 미국의 전쟁을 말한다.
미국은 1855년(철종 6년), 1865년(고종 2년), 1866년(고종 3년) 등 3회에 걸쳐 조선의
동해안인 통천, 영일 연해, 선천군에 표류했다.
이때마다 조선은 미국의 배를 청나라로 호송하는 등 친절을 베풀었다.
그러나 1866년 7월, 평양의 대동강에 들어와 통상을 요구하던 미국 상선 "제너럴셔먼호"를
조선인들이 불태운 사건이 발생한다.
이를 빌미로 미국은 1867년 슈펠트 중령이 타고 있는 군함을 파견해 조선의 황해도 연안을
수색했고, 무력에 의한 강제통상을 계획했다.
1868년에도 군함을 파견해 조선에 대해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동시에, 통상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황해도, 평안도 등지를 배회하다가 지방 관리와 회담만 한 채 성과없이 돌아갔다.
미국 국무부는 조선과의 통상을 추진하기 위해서는 군함을 거느리고 무력시위를 하는 것만이
최선의 방법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1869년, 미국 제 18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율리시스 그랜트는 다음해 1월, 베이징 주재 미국
공사 로(Low)를 조선 전권공사로 임명한다.
그리고 조선과 협정을 체결하라는 교서를 내리고, 아시아 함대 사령관인 존 로저스에게
조선원정을 단행하도록 지시한다.
이에 로저스는 1871년 "로" 공사와 상해를 떠나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해 함대를 집결시킨다.
그리고 콜로라도호를 비롯한 호위함 3척과 포함 2척, 대포 85문, 병력 1,230명을 거느리고
나가사키를 출발해 조선으로 향한다.
1871년 6월 1일, 강화도 손돌목에서 첫번 째 포격전이 벌어졌고, 11일에는 미군의 함포사격과
상륙전으로 어재연 장군이 지휘하던 광성보가 함락됐다.
총지휘관이 있는 본영을 상징하는 수자기(帥字旗)가 휘날리던 자리에는, 대신 성조기가
올라갔다. 미군 피해는 전사자 3명, 부상자 9명에 불과했지만, 조선군은 부지휘관인 진무중군
(鎭撫中軍) 어재연 장군을 비롯해 전사자만 350명에 이르렀다.
군직(軍職)에 있던 어재연 장군의 동생 어재순도 백의종군해 형제가 모두 목숨을 잃었다.
'장수' 수(帥)字가 쓰여진 조선군의 혼 수자기는 미군의 전리품이 되어 애나폴리스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내졌다. 또 깃발 수십 점과 대소구경 화포 200여 문도 함께 가져갔다.
그리고 136년 만에 장기대여 형식으로 한국으로 돌아와 현재 한국고궁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신미양요 당시, 조선군이 무능해서 참패한 것이 아니다.
조선은 강화도에 진무영(鎭撫營)을 별도로 두고, 총책임자인 진무사(鎭撫使)에 정2품을
임명했을 정도로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는 병조판서와 같은 품계로, 당시 진무사는 어영대장과 훈련대장을 역임한 정기원(鄭岐源)
이었다. 또 강화 판관은 이창회(李昌會)였다
신미양요 당시, 양국의 병력은 비슷했다.
조선군이 1,000명, 미군이 교전부대와 대기부대를 합쳐 총 1,230명이었다.
그러나 조선은 군복이라는 개념조차 제대로 없던 시기이다.
대원군의 명령으로 면 30장으로 누빈 면갑(綿甲)이 방탄복을 대신했지만, 이 옷은 사거리
120m 짜리 화승총에는 효과를 발휘했지만, 미군이 갖고 있던 사거리 400m와 914m 의
레밍턴 소총과 스프링필드 소총에는 속수무책이었다.
화력에서도 엄청난 차이가 났다.
대포의 경우 조선군은 사거리 120m의 블랑기포가 주력이었고, 가장 멀리 나가는 홍이포
사거리도 700m에 불과했다.
반면에, 미군은 사거리가 1,564m의 9인치 함포를 앞세워 남북전쟁 때보다 더 강력한
포격을 가했다.
당시 미군 측의 기록을 보면, 포대에 꽂혀있던 수자기를 조선군 포수 네댓 명이 몸으로
꽁꽁 묶어 지키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조선군은 목숨을 다해 끝까지 용감하게 싸웠다.
부상자 20여 명을 빼고는 전멸한 것이다.
참전 장교들과 종군기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기록했다.
* "조선군은 근대적인 무기를 한 자루도 보유하지 못한 채 노후한 전근대적인 무기를
가지고서 근대적인 화기로 무장한 미군에 대항해 용감히 싸웠다.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하여 용맹스럽게 싸우다가 모두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강력하게 싸우다가 죽은 국민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슐레이 大領)
* "조선군은 용감했다. 그들은 항복 같은 건 아예 몰랐다.
무기를 잃은 자들은 돌과 흙을 집어 던졌다.
전세가 결정적으로 불리하게 되자, 살아남은 조선군 1백여 명은 포대 언덕을
내려가 한강물에 투신 자살했고, 일부는 스스로 목을 찔러 자결했다."
(앨버트 가스텔)
* "남북 전쟁때에도 그렇게 짧은 시간에, 그렇게 많은 포화와 총알이 쏟아진 적은
없었다." (블레이크 中領)
* "이 전투는 동양에서 미국 해군의 위신을 손상시키고, 외교의 실책을 폭로한
최고의 사건이다" (미 국무장관 포스터)
* 조선군은 수자기를 뺏기지 않으려고 포수 네댓 명이 수자기로 몸을 꽁꽁 묶어
끝까지 처절하게 저항했다. (미군 기록)
... 그로부터 9년 후인 1882년 5월 22일, 우리나라 전권대신 신헌(申櫶)과 미국 슈펠트 (Shufeldt)
제독은 화도진(花島鎭)에서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조인하게 된다.
이는 우리나라가 구미(歐美) 제국과 맺은 최초의 조약으로, 명백한 불평등 조약이다.
그리고 다음 해인 1883년 1월부터 인천 제물포항이 개항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