松谷田家詞
(소나무 농가)
花暖山村節氣柔 꽃 피는 산골마을 화창한 계절
老農相過酒新芻 나이 든 농부들 새 술 걸러놓고 서로 청하네
鴦歌燕語都無管 원앙 노래, 제비 소리 모두 아랑곳하지 않고
第一先聽喚雨鳩 '구우구우' 비 부르는 비둘기 소리 제일 먼저
살펴 듣네
~* 김택영(金澤榮) *~
루(樓)에 올라
남에서 날아오는 기러기 소리, 시름 많은 나의 잠을 흔들어 깨워
밤에 홀로 높은 루(樓)에 올라서 보니 달빛만 하늘에 가득 찼구나.
하루 열두시 그 어느 때인들 고국을 그리지 않았겠는가
멀고 먼 삼천리 이역 땅에서 이 한해를 또 다시 보내야 하는가
아우도 형님도 이젠 늙어서 모두 다 백발이 성성한데
그리운 아버지와 할아버지는 조용히 청산에 누워 계시리
우리 모두 힘을 모아 조국을 되찾고, 산과 들에 무궁화 하얗게 피면
푸른 물결 출렁이는 2천리 압록강에, 배 띄워 두둥실 고향으로 돌아가세
~* 김택영(金澤榮) *~
<김택영의 사진>
<김택영의 자필>
* 김택영(1850~1927)
조선 말기 학자. 자는 우림(于霖), 호는 창강(滄江), 당호는 소호당주인(韶護堂主人).
소년시절부터 고문(古文)과 한시(漢詩)를 공부하여 시문에 능하였다.
詩의 황현, 文의 이건창과 함께 한말삼재(韓末三才)로 불리며 한문학사의 마지막을
장식한 大家이다. 특히 역사서술에 심혈을 기울였다.
15살에 과거에 급제한 이건창, 17살에 급제한 황현과 달리 김택영은17세에 성균관
초시에 합격한 후, 42살 때 성균진사(成均進士)가 되었다.
19세 때 이미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23세에 평양과 금강산 등지를 돌아다니며
빼어난 시문을 남겼다.
또 추금(秋琴) 강위(姜瑋), 매천 황현, 명미당 이건창 등과 깊은 교우관계를 맺었다.
1882년 김윤식(金允植)의 추천으로 임오군란 때 서울에 들어온 중국의 진보적인 지식인
장젠(張騫)과 알게 되었는데, 김택영은 장젠으로부터도 시문을 격찬받았다.
1894년(고종 31)엔 김홍집(金弘集) 내각의 편사국주사(編史局主事)로 기용되어 주로
역사 편찬에 참여하였다.
1895년에 중추원 서기관 겸 내각기록구 사적과장(史籍課長)을 지냈다.
이때 사례소(史禮所)에서 장지연(張志淵) 등의 젊은 문사들과 교유하며 <대한예전
(大韓禮典)>를 펴냈다.
이듬해 사직을 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던 김택영은 을사조약이 체결되자 나라의 장래를
통탄하다가 1908년, 중국으로 망명을 했다.
양쯔강 하류 통주(通州)에 정착한 후에는, 학문과 문장 수업으로 여생을 보낸다.
특히 고시(古詩)에 뛰어나서 문장과 학문에서 청나라 캉유웨이(康有爲), 정샤오쉬(鄭孝胥)
등과 어깨를 겨룰 정도로 명성을 떨쳤다.
중국에 살면서 <안중근전>을 펴내 민족의식의 고취를 꾀했고, 한일합병조약 체결에
항의해 자결한 친구인 매천 황현의 행장과 시문을 모아 <황현본전(黃玹本傳)>,<매천집
(梅泉集)>, <속매천집(續梅泉集)〉등을 펴냈다.
중국 망명 후 한문학에 대한 정리와 평가 작업을 꾸준히 했는데, 고문(古文)은 명의
귀유광(歸有光)과 박지원(朴趾源)의 문장을 특히 좋아했다.
고문가(古文家)로서 문장일도(文章一道)를 주장하며, 우리나라 고문의 전통과 맥락을
독자적으로 체계화시키는 데 노력했다.
더불어 많은 시를 창작했는데, 그의 시는 호방하고 화려하면서 신운(神韻)을 중시했고
중국에 망명한 뒤에는 나라를 잃은 슬픔을 노래한 작품을 많이 썼다.
<오호부(嗚呼賦)>는 그 대표적인 작품이다.
한편 역사서술에도 힘을 기울여 1916년 <교정삼국사기(校正三國史記)>, 1918년 조선
시대의 역사를 6권으로 기술한 <한사계(韓史棨)>를 펴냈으며, 1922년에는 28권 9책의
순한문체 통사인 <한국역대소사(韓國歷代小史)>를 간행했다.
1927년 그가 죽은 뒤 동지들과 제자들이 <창강선생실기>를 발간했고, 정인보가 서문을 썼다.
그의 시문집으로는 <창강고(滄江考)>와 <소호당전집(韶護堂全集)>이 있다.
그동안 3회에 걸쳐, 한말을 빛낸 천재적인 문장가 세 명의 시와 일생을 살펴보았다.
일명 한말삼재(韓末三才)로 불리며, 역사에 고매한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다.
한데... 참으로 이상한 일 아닌가?
일제와 외세침략에 대항한 세 명과 그의 가족들은 목숨을 잃거나 엄청난 시련을 겪었다.
매천 황현은 단 한 번도 국록(國祿)을 먹지 않았음에도 경술국치 이후 자결했고, 명미당
이건창의 조부 이시원과 이지원은 병인양요 때 책임을 지고 죽는 관리들이 한 명도 없음이
부끄럽다며 형제가 "귀신이 되어서라고 나라를 지키겠다"고 동시에 목숨을 끊었다.
가장 오래 살았던 창강 김택영은 일본을 피해 중국으로 망명가서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있다. 그의 묘는 지금 남통(南通)에 있는 낭산(狼山) 공원에 찾는 이도 없이 쓸쓸히 있다.
심지어 우리나라에는 낭산이 아니라 남산(南山)으로 알려졌기까지 하다.
그러나 일본에 은사금을 받고 나라를 통째로 팔아넘긴 자들과 그 후손들의 삶은 어떤가?
당대는 물론 해방후 그리고 현재까지 가장 좋은 교육을 받아왔고, 호의호식하며 부귀영화를
누리며 부끄러움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의 비참한 삶과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우리나라 역사의 현실이다.
그래서 한국의 역사가, 이 나라의 슬픔이, 정치적 갈등이 계속 혼란을 겪고 있는 것이다.
가장 근원적인 문제점은 바로 이것이다.
차라리 북한처럼 해방 후, 바로 친일파들을 역사적으로 정리했더라면 정치적 부담도 적고
친일문제로 그 오랜 세월을 혼란스럽게 갈등하며 보내지는 않았을 것이다.
또 친일파의 후손들 또한 친일문제가 거론될 때마다 스트레스를 받는 일이 덜했을는지도
모른다.
특히 독립운동가들의 후손을 위한 복지를 확대해 그들의 삶을 안정시키고, 훌륭한 조상을
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살아가게 했더라면, 친일파에 대한 적개심도 훨씬 덜했을 것이다.
아울러 독립운동가들의 후손도 애국의 의미를 되새기며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을 터이다.
그런 면에서 생각해보면, 그동안의 국가정책에 아쉬움이 남는다.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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