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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미당(明美堂) 이건창의 詩

아라홍련 2013. 3. 22. 03:05

 

 

 

 

 

                                    月夜於池上作

                                                          (달밤에 못에서)

 

 

 

                   月好不能宿     달이 하 좋아 잠이 오지 않아
                   出門臨小塘    대문 나와 연못에 이르렀네
                   荷花寂已盡     연꽃은 이미 다 지고 없어도  
                惟我能聞香     나만은 연꽃 향기 맡아 볼 수 있다네

                   風吹荷葉飜    바람 불어 연잎 뒤집히자
                   水底一星出    물 밑에서 별하나가 나오네
                   我欲手探之    손으로 그 별 잡아 보려니  
                   綠波寒浸骨    물결 차가움이 뼈에까지 스미누나.  

 

                                                    ~* 이건창(李建昌) *~              

 

 

 

* 영재(寧齋) (1852~1898)

       

      양명학파의 적자(嫡子).

      당대 최고의 천재적인 대문장가이자 대학자이다.  

      조선 말기의 문신이다.     

      조선왕조 제 2대 왕 정종의 별자(別子)인 덕천군의 후손으로, 이몽(異夢)에 나오는

      이시원(李是遠)의 손자이다. 

      철종이 강화도 유배 당시, 암행어사를 끝으로 강화도에 낙향해 한 동네에 살고있던

      이시원의 청렴함과 인품에 반해 즉위 후 유일하게 인사권을 행사했던 인물이다.

      개성유수, 개성 도청관을 지냈고 그후 함경도 관찰사,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이건창황현김택영과 함께 한말삼재(韓末三才)로 꼽히는 천재적인 대문장가이다.

      5살에 이미 문장을 지었으며, 1866년(고종 3년)에 15세의 나이로 문과에 급제한 역대

      최연소 과거급제자이기도 하다.

      너무 어린 나이에 과거에 급제하자 조정에서는 4년 뒤인 1870년, 19살이 될 때 비로소

      첫 벼슬을 내렸다.  

      최연소의 나이로 옥당(玉堂, 홍문관)에 들어간 이건창은 문서를 관리하고, 왕의 자문에

      응하는 일로 관리생활을 시작한다.    

      15살 때인 1866년, 프랑스 군대가 쳐들어와 강화도가 함락되자 조부인 이시원은 국가의

      불행에 죽는 관리가 한 명도 없음을 개탄하며, 신하로서는 도망갈 수가 없다고 유소(遺疏)를

      올린 뒤 약을 먹고 자결했다.

      이때 이시원의 동생인 이지원(李止遠)도 함께 자결했다.  

      이시원은 왕에게 올린 유소에서 "자신이 동생과 함께 자결하는 것은, 귀신이 되어 적을

      섬멸하려는 의리에서 나온 것"이라고 분명하게 밝혔다. 

      귀신이 되어서라도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해보겠다고 두 사람이 동시에 절명(絶命)

      대단한 의사(義士) 집안이다

      조선의 천주교 탄압을 구실로 프랑스가 전쟁을 일으킨 병인양요로 인해 2명의 조부가

      동시에 자결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이건창은, 현실과 역사에 눈을 뜬 후 서양과 일본의

      침략을 철저히 배격했다.

     

      1875년, 암행어사로 나갔다가 관찰사 조병식(趙秉式)을 탄핵한 일로 오히려 벽동에

      유배된 뒤, 충격을 받아 그때부터 벼슬길을 접었다.

      이후, 고종이 부를 때 어사로 나가 비리를 고발하며 민폐를 해결했으나, 갑오개혁

      이후에는 왕의 부름에 일체 응하지 않았다.

      고종은 이건창에게 글을 부탁하며 이런 편지까지 보낼 정도로 신뢰를 보냈다.

 

             글을 짓는 데 그대가 꼭 필요하다.

             국난을 지은 허물은 다 나에게 돌리겠다.

             다만, 대원군을 위하여 명백하게 사실을 밝혀

             이 글을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한 글자를 볼 때마다

             한 방울의 눈물을 흘릴 수 있도록 하라.       

 

      그럼에도 왕의 부름에 계속 응하지 않자, 결국 고종의 미움을 사서 고군산도에 유배되기도

      했다. 후엔 강화도에 칩거하며 양명학자로서 연구에만 몰두하고, 정치와 경제의 기반을

      심학(心學)에 두면서 비주체적 개화를 극력 반대했다.

      특히 이건창은 한말삼재의 한 사람인 창강 김택영(金澤榮)이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우수한 고문가(古文家) 9명을 뽑았던 사람 가운데 한 명으로 꼽혀 여한구가(麗韓九家)에

      속할 정도의 천재적인 대문장가였다.

      저서로 <명미당집(明美堂集)><당의통략(黨議通略)>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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