往兔洞
(토동에 가다)
歲閏春差晩 윤달이 있는 해 봄은 약간 늦으니
朝朝二月寒 아침마다 2월 추위 쌀쌀하다
白風江外野 맑은 바람은 강 건너 들판에 있고
蒼日雪餘山 희뿌연 해 잔설 쌓인 산에 걸렸다
渡遠停船待 멀리서 강을 건너 배를 대고 기다리니
村殷采木還 마을은 풍족해 나무해서 돌아온다
西崦行徑熟 서산으로 다니는 길이 뚜렷하니
烟處認松關 연기 나는 곳에 집이 있음을 알겠네
~* 황현(黃玹) *~
* 황현(黃玹)
철종 5년인 1855년, 전남 광양군에서 태어나서 1910년 卒했다.
매천야록(梅泉野錄)을 쓴 조선 후기의 대학자이다.
일찍이 스승인 왕석보(王錫輔)는 황현이 장차 큰 학자가 될 것이라고 예견했다.
1875년, 24세 때 서울로 올라온 황현은 이건창, 김택영 등과 교유하면서 차츰
문재(文才)를 떨치기 시작하다가, 한말 삼재(三才) 중 한 명으로 꼽히게 되었다.
1883년 29세 때 부모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했으나, 시골 출신이라는
이유로 2등으로 합격하자 벼슬길을 단념하고 낙향해 칩거에 들어가 제자들을
길렀다.
1888년 34세 때 부모의 권유로 다시 과거에 응시하여 합격했지만, 암담한 정치
현실에 절망하여 벼슬길을 영영 단념한 뒤, 전남 구례 월곡 마을에 은거하며
<매천야록>, <오하기문(梧下記聞)>, <동비기략(東匪紀略)> 등을 썼다.
1910년 56세 때, 일제에 의해 끝내 나라가 강탈당한 소식이 전해지자 단 한 번도
국록(國祿)을 먹은 적이 없건만, 지식인으로서의 책임을 통감하고 절명시(絶命詩)
네 수와 유서를 남긴 채 자결로 생을 마감했다.
절명(絶命)이란, 하늘이 본래 인간에게 준 명을 끊는다는 뜻이다.
중국 최고의 역사서인 서경(書經)의 고종융일(高宗肜日)에 보면,
非天夭民 民中絶命
(하늘이 백성을 일찍 죽게하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이 마음으로 명을 끊는 것입니다.)
라는 말이 나온다.
때문에 절명이란 "하늘이 내려주신 목숨을 하늘의 뜻과는 상관없이, 인간
스스로가 끊어버리는 것"을 말한다.
세상이 타락하여 백성이 도탄에 빠지고 정의가 행하여지지 않을 때, 이에
절망한 애국지사들이 주로 행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오랫동안 국록을 먹으며 부귀영달을 누렸던 고위관리들은 은사금을
받고 나라를 일본에 팔아넘긴 뒤, 일제시대 내내 권력을 틀어잡았다.
친일파들은 곤궁함에 빠진 백성들의 고통은 외면한 채 호의호식하며, 일본을
등에 업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았다.
<황현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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