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로그 앞 글에서 시경(詩經)이 지금으로부터 3,000년 전의 노래집이라고 언급했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역사... 하면 600여 년전 조선시대에 목을 매고 있거나, 고려시대, 삼국시대,
고조선을 생각하며, 고리타분하거나 미개한 시대로 생각한다.
이는 잘못된 생각이다.
역사는 인류 최초의 문명을 수메르 문명이라고 정의한다.
수메르 문명은 기원전 3,800년...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5,800년 전 인류 최초의 문명이다.
약 2백만 년 전에 석기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한 인간은, 약 5,800년 전 지금의 북부 이라크인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 갑자기 고도의 문명을 꽃피웠다.
위대한 고고학자들은 수메르 문명의 미스테리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프랑크포르트(H.Frankfort)는 "놀랍다(astonishing)"고 표현하고, 아미에(P,Amier)는
"비범하다(extraordinary)"고 찬탄한다. 또 페로트(A.Parrot)는 "갑자기 나타난 불꽃"이라고
표현하고, 오펜하임(L.Oppenheim)은 수메르 문명이 등장한 "엄청나게 짧은 기간"에 대해
감탄한다.
그러나 수메르 문명에 대한 표현 중 백미는 바로 캠벨(J.Campbell)의 말이다.
수메르의 좁은 진흙땅에서 정말로 갑자기 세계의 모든 고등 문명을
구성하는 단초(端初)들이 일시에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수메르 문명이 5,800년 전에 시작됐다는 근거는 어디에서 만들어진 것일까?
1919년 홀(H.R.Hall)은 현재 엘우바이드(El-Ubaid)라고 부르는 마을에서 고대의 유적지
하나를 찾아냈다. 이 유적지는 수메르 학자들이 위대한 수메르 문명의 첫 번째 단계인
"엘우바이드 시기"라고 인정하는 바로 그곳이다.
그보다 훨씬 아래쪽에서는 수메르 최초의 도시라고 하는 에리두(Eridu)가 발견됐다.
발굴자들이 이 유적지를 깊이 파들어 가자 수메르인들이 지혜의 神으로 모셨던 엔키(Enki)
의 신전(神殿)이 나타났다. 이 신전은 여러 시대에 걸쳐 새로 지어진 것으로 확인됐다.
유적지의 지층을 계속 아래로 파들어 가면서, 고고학자들은 수메르 문명의 시작점을 계속
바로잡아야만 했다.
즉 기원전 2,500년에서 2,800년으로, 다시 기원전 3,000년에서 3,500년으로 계속 올려잡아야만
했다. 그러다가 마침내 파내려 가던 삽이 "엔키"에게 바쳐진 최초의 신전터에 이르게 됐다.
그 아래로는 아무것도 지어진 흔적이 없는 깨끗한 흙이었다.
그래서 최초의 신전은 기원전 3,800년 전에 지어진 것으로 최종 확인됐다.
문명의 요람 수메르 문명이 처음 시작된 때가 바로 지금으로부터 5,800년 전의 일이다.
수메르 문명을 인류 최초의 고도의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무슨 이유 때문일까?
유적지에서 발굴된 물건과 기록들 때문이다.
엄청난 규모의 신전과 석조 건축물, 세계 최초의 문서, 세계 최초의 원통형 인장, 금과 은,
구리와 청동으로 만들어진 장엄한 화병과 장신구, 무기, 전차, 투구, 방직공장의 잔해,
최초의 진흙 벽돌, 모자이크 장식, 기하학적 무늬가 그려진 도자기들, 구리 거울, 터키석으로
만든 구슬, 눈꺼풀 화장품 등이 발견됐다.
그러나 이런 유형적인 물건만 발견된 게 아니다.
음악과 노래도 수메르 문명에서 최초로 시작됐음이 확인됐다.
앞서 시경(詩經)의 노래들이 기원전 1,000년 전에 만들어진 노래라고 했는데, 그보다 수천 년
앞서 음악과 노래가 만들어진 것이다.
유적지에서 수금(竪琴)등 각종 악기가 발견됐고, 기원전 2,000년경의 기록을 보면 이미 일관된
음악 이론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음악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래됐다는 것도 확인됐다.
1974년 미국 캘리포니아 버클리 대학의 크로커(R.L.Crocker)와 킬머(A.D.Kilmer), 브라운
(R.R.Brown) 교수팀은 시리아에서 발견된 3,800년 전의 점토판에 새겨진 악보를 읽고, 최초로
연주하는 방법까지 찾아냈다.
수메르 문명시대에 그리스 음악이나 현대 서양음악의 특징과 똑같은 7음 음계와 온음계로
음악이 만들어져 있었음이 최초로 확인됐다.
수메르인들은 "음악을 통해 우주적 화합과 통합"을 추구했던 것이다.
많은 연가(戀歌)들이 발견됐고, 가수와 무희들이 그려진 그림으로 인해 공연예술도 발전했었음이
확인됐다.
유적지에서 발견된 점토판에는 쐐기모양의 표식인 설형문자(楔形文字, Cuneiform)로 38개의
법령도 기록돼 있었다.
부동산, 주인과 노예, 결혼, 상속, 배의 임대, 소의 임대, 세금 체납 등에 대한 공표된 법률이었다.
또 60진법과 태양력을 채용해 수리와 과학, 문화적으로 큰 발전을 이루기도 했다.
천문학 또한 현대에서도 감탄할 정도로 정교한 과학적 기술이 급속히 발달했다.
2,000년 후에야 공식적으로 알려진 천왕성의 존재도 이미 알고 있었고, 심지어 육안으로는 관측할
수 없는 해왕성과 명왕성에 대한 기록까지 있다.
당시에 만든 책력(冊曆)은 5천년이 훨씬 지난 지금까지도 그 정확성으로 이름높다.
이뿐만이 아니다.
양파와 콩, 오이, 배추 등은 수메르인의 일상식이었으며, 기록과 그림을 통해 수메르인이 곡물로
가루를 만들고, 그것으로 빵, 죽, 과자, 케이크 등을 만들었다는 것도 확인됐다.
점토판에는 보리를 발효시켜 맥주를 만들었다는 맥주 제조에 대한 설명이 적힌 기록도 있었다.
포도와 대추야자로 술을 만들었고 소와 양, 염소의 젖으로는 요쿠르트와 버터, 크림, 치즈 등을
만들어 먹었다.
물고기도 일상적인 음식재료 중 하나였다. 양고기는 흔했으며, 돼지고기는 진미 중 하나로
여겨졌다. 오리와 거위는 신의 식탁을 위해 따로 보관되었다.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고대의 고급 요리들은 신에게 드리는 제사용으로 발달됐음을 알 수 있다.
한 점토판에는 "보리빵과 밀빵, 꿀과 크림으로 만든 과자, 대추야자, 맥주, 포도주, 우유, 삼목 수액,
크림"등이 신에게 바치는 음식들로 기록돼 있다.
구운 고기는 최고급의 맥주, 포도주, 우유와 함께 진상되었다.
또 수메르인들은 대양 항해도 자유롭게 했다.
다양한 종류의 배를 이용해 금속과 귀한 목재, 보석, 광물 등을 수송했다.
<수메르어-아카드어 사전>에는 선박에 대한 항목에 무려 105개나 되는 단어들이 나열돼 있다.
또 배의 건조와 선원들의 임무에 대한 단어들도 69개나 나와 있다.
최초의 학교도 수메르에서 시작됐다.
문자의 발명과 도입의 결과로 가능해진 것이다.
점토판 기록을 보면 기원전 3,000년대, 즉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 경에 수메르에는 공식적인
교육 제도가 존재했다.
학교에서는 언어와 문자뿐만 아니라 식물학, 동물학, 지리학, 수학, 신학 등의 학문을 가르쳤다.
학교는 움미아(Ummia, 전문교수)가 이끌었다.
"그림을 가르치는 선생", "수메르어를 가르치는 선생", 심지어 "채찍을 담당하는 선생"도 있었다.
학교의 규율은 아주 엄격했다.
한 학생이 점토판에 기록한 내용을 해석하면 학교에 출석하지 않거나, 정결하지 못하거나,
게으름을 피우거나, 떠들거나, 비행을 저지르거나, 심지어 글씨가 깨끗하지 못할 경우에도
매을 맞았다고 적혀있다.
... 정말 놀라운 일 아닌가?
위의 일들은 고고학자들이 유적지에서 찾아낸 물건과 점토판 기록들을을 해석해 밝혀낸,
지금으로부터 약 5,800년 전의 일들이다.
수메르 문명을 인류 최초의 문명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한데 조선시대나 고려시대, 삼국시대, 고조선의 일들을 아득하고 고루한, 미개한 문화가
존재했던 시절로 생각한다면 이는 한마디로 무지의 소치이다.
기원 전 3,800년 전의 수메르 문명!.....
어느날 갑자기 메소포타미아 지방에 고도의 문명이 나타났지만, 현재까지 어떤 위대한
고고학자나 역사학자도 그 이유를 밝혀내지 못하고 있다. 심지어 추측조차 하지 못한다.
수메르 문명에 대한 가장 큰 의문점은 수메르인이 도대체 누구였으며, 그들이 어디서 왔고,
어떻게, 그리고 왜 갑자기 고도의 문명이 만들어졌느냐이다.
하지만 세계의 어느 위대한 학자들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전혀 답변을 하지 못한다.
전혀 앞선 문명 없이, 너무 갑작스럽게, 독자적으로 발생한 고도의 문명이었기 때문이다.
역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한국사만 공부해서는 안된다.
시야가 편협하고 단천(短淺)해서 역사인식이 올바르지 않고, 균형을 잡지 못해 자기주장만
맞다고 억지를 부리기 때문이다. 역사왜곡은 바로 여기에서부터 비롯된다.
그래서 나는 역사를 공부하거나 관심이 많은 사람들에게 한국사와 함께 서양사와 고고학을
함께 공부하라고 권한다.
이렇게 공부하면 시야가 훨씬 넓어지고, 전체적인 맥락에서 역사를 관통해 이해할 수가 있다.
우리나라 역사와 세계역사를 함께 바라볼 수 있을 때, 우물 안 개구리에서 벗어날 수 있다.
역사를 좀 더 멀고 넓게, 좀 더 깊게 바라볼 수 있는 훈련을 끊임없이 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래야 인간에 대해, 영혼의 존재에 대해, 역사와 정치에 대해, 삶과 철학에 대해 비교적
진실에 가까운 접근이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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