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4년 전인1999년 12월 1일, 국립중앙박물관에서는 매스컴의 관심 속에
희귀한 물건 하나를 공개했다.
바로 <12월 이달의 문화재 전시품목> 중 하나인 영조가 직접 쓴 '어제사도세자
묘지문(御製思悼世子墓誌文)이다.
가로 16.7cm, 세로 21.8cm, 두께 2.0cm 사각형 청화백자 5장에 쓰여있는 것으로
작성일자가 영조 38년 (1762년) 7월로 되어 있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한 영조가 아들의 죽음을 비통해하며, 참혹한 심경을
토로한 묘지문이 250년 만에 공개된 것이다.
1968년 서울 휘경동에 거주하는 이종만 씨로부터 기증받아 보관해오다가, 31년만에
공개를 결정했다.
그동안은 정조가 사도세자의 명복을 빌기 위해 쓴 글은 <조선왕조실록>과, 정조의
개인문집인 <홍재전서>가 유일했다.
그러나 이 묘지문이 공개되자 사학계가 발칵 뒤집혔다.
그동안 베일에 가려졌던 사도세자의 죽음에 대한 영조의 역할과 심중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충격적인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일부에서 노소당인(老少黨人)간의 정쟁으로 노론에 의해 사도세자가 희생된
것으로 보는 시각이 있었는데, 묘지문 내용을 보면 전혀 다르다.
또하나, 사료적 가치가 뛰어난 것은 본래 묘지문은 뛰어난 학자들이 쓰는 경우가
대부분인데, 이 경우에는 왕이 "이것은 신하가 쓴 것은 아니며, 내가 누워서 받아적게
하여 짐의 30년 마음을 밝힌 것이니..."라고 왕이 묘지문에서 분명히 밝혔기 때문이다.
상심하여 쓰러져 누워있는 상태에서 신하들에게 구술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묘지문을 읽어보면 영조가 왜 아들을 뒤주에 가두었는지 그 이유가 상세하다.
한마디로 죽이려고 뒤주에 가둔게 아니라, 방종이 극단에 이른 아들을 훈육하기 위해서
세손강서원(世孫講書院)에서 뒤주를 지키게 했다는 것이다.
세손강서원은 조선시대에 왕세손(王世孫)의 교육을 담당하던 관청을 말한다.
관원으로 종1품 사(師)·부(傅) 각 1명, 당하(堂下) 3품부터 종2품에 이르는 좌·우유선
(左右諭善)각 1명, 종4품 좌·우익선(左右翊善) 각 1명, 종5품 좌·우권독(左右勸讀)
각 1명, 종6품 좌·우찬독(左右贊讀) 각 1명을 두었다.
바로 이들로 하여금 뒤주를 지키게 한 것이다.
"여러날 (뒤주를) 지키게 한 것은 종묘와 사직을 위함이었는데...진실로 아무 일이
일이 없기를 바랐으나, 9일 째 망극한 비보를 들었다."고 하는 원통함이 구구절절
배어나고 있다.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가 성군이 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난잡하고 방종한 짓을 배워
여러번 타일렀으나 제멋대로 언교를 지어내고, 군소배들과 어울리니 장차는 나라가
망할 지경에 이르렀노라."면서 왜 아들을 뒤주에 가둘 수밖에 없었는지 그 절박한
이유를 소상히 밝히고 있다.
또 영조는 미치광이 괴물로 변한 아들을 탓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아들을 죽게 만든
비통한 심정을 곳곳에서 절절이 토로하고 있다.
"새벽부터 밤까지 태갑의 뉘우침 같은 것을 바랐으나, 마침내 만고에
없는 일을 저지르도록 했구나.
슬프다! 이 누구의 잘못이란 말인가. 내 그를 옳게 가르칠 수 없어
이런 일까지 이르니 어찌 하리오. 슬프다!
너 만약 일찍 돌아왔다면, 어찌 이런 시호 있으랴."
"너가 무슨 마음으로 칠십의 아비로 하여금 이런 경우를 당하게 하는고.
도저히 참을 수 없어 구술하노라."
한마디로 사도세자의 미친 행동을 감당하지 못한 부왕 영조는 정신을 차리게 하려고
아들을 뒤주에 가둬두었는데, 그 정도가 지나쳐 아들을 죽게 만든 것이다.
영조가 손자인 정조에게 엄격히 제왕학을 가르치고, 반대세력들을 철저히 봉쇄해
정조가 무사히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게 발판을 마련했던 미스테리가 풀린 셈이다.
한데 많은 사료와 이런 묘지문까지 나타나도, 기록에 나타난 사도세자의 행실과
악행에 대해서는 침묵하면서 여전히 사도세자가 당쟁에 의해 희생됐다고 떠들며,
심지어 개혁 군주의 성향을 보였느니 애민사상이 있었느니 황당한 얘기들을 늘어
놓는 사람들이 있다.
이는 역사공부를 아예 하지 않았던지, 아니면 불순한 다른 목적 때문일 것이다.
역사는 사심없이 순수하게 접근해야 진실에 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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