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청백리(淸白吏)의 덕목

아라홍련 2013. 2. 24. 03:56

          

 

 

        청백리(淸白吏)의 사전적 의미는, '성품과 행실이 올바르고 탐욕이 없는 관리'를 말한다.

          관리는 나라의 녹봉을 받으면서 국가 또는 지방 자치 단체의 일을 하는 사람들을 뜻한다.  

          한마디로 공무원을 말한다.

          국가를 경영하는 연관 조직에 몸담고 있으면, 그 자체가 일종의 권력적 성격을 띠게 된다.

          연륜이 있어 조금만 상위 직책에 올라가도 공무원이나 공공기관의 조직원들이 일반인에게

          갖우월감이나 파급력은 상당하다.

          고위직 관리들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고위직이라는 단어가 권력 자체를 상징할 정도이다.

          이는 적성과 상관없이 많은 젊은이들이 공무원이 되기 위해 고시공부처럼 공무원시험

          준비에 목을 매고 있는 작금의 현실만 봐도 증명이 된다.

          허나 이들이 꼭 염두(念頭)에 두어야 할 것은, 남들보다 뭔가 더 가지고 있는 것이 있다면

          거기에는 그에 상응하는 의무나 댓가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점이다.

          특히 권력이나 돈, 힘, 재능, 학식, 기술을 다른 이들보다 좀 더 가지고 있다면 그것을

          단순히 기득권으로만 생각하거나 부귀영달의 방법으로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하늘에서 뭔가 특별한 것을 선물로 내려주었을 때는, 반드시 그에 따른 의무와 사명, 또

          숙제도 동시에 함께 내려주기 때문이다. 

          한데, 이를 무시하고 자신이 가진 재능과 힘을 오로지 부귀영화와 입신출세를 위한 욕망의

          열차로 생각하고 계속 달리다 보면, 어느 한순간에 뼈아픈 가를 치루게 된다.       

 

          조선시대에도 관리가 되기 위한 노력은 처절했다.

          유생들의 공부의 목표는 곧 사로(仕路)에 나서기 위한 방법이었다.   

          조선시대에는 2대에 걸쳐 벼슬한 사람이 없으면, 그 집안은 자동적으로 양인(良人)이 되었다.

          사대부, 양반에서 제외돼 신분 자체가 달라지는 것이다.

          양인은 양반과 천민의 중간 계층을 말한다.

          예전에 아무리 벼슬아치를 많이 낸 집안이거나, 공신을 낸 집안이라 하더라도 예외가 없었다.

          법규로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가문을 살리기 위해, 여항인으로 살아가지 않기 위해 조선시대의 젊은이들은 지금의

          공무원 시험 준비보다도 더 가혹하고, 더 처절하게 공부에 매달려야만 했다. 

          유생들 삶의 최고, 최선의 목적은 출세하여 가문과 이름을 세상에 떨치는 입신양명(立身揚名)

          이다.   

          입신양명이나 입신출세(立身出世)에는 단순한 부귀영달 외에도, 이처럼 자신의 가문을 양반

          으로 계속 존속시키거나 신분 상승을 위한 유일한 방법이 숨어있었다.

 

 

          때문에 치열하게 공부해 벼슬길에 나서 권력을 손에 쥐게 되면, 그동안의 고생과 엄청나게

          들인 시간과 경비, 심리적인 피로, 그에 따른 희생까지도 보상받으려는 심리가 본능적으로

          샘솟게 된다.

          이것은 거의 무의식과 본능에 가까운 감정이다.

          때문에 올바른 인생관과 정확한 자아정체감을 가지고 자신의 본능을 제어해야지만, 국민에게

          해를 끼치는 탐관 오리가 되지 않는다.

          관직으로 위세를 부리거나 부를 축적하는 수단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 자신의 직무를 

          좋은 세상을 만들거나 민초들의 삶을 향상시키는 일의 주춧돌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면, 그는

          직위의 고하와 상관없이 진정한 청백리(淸白吏)라고 할 수 있다. 

 

        청백리(淸白吏)란 단어의 사전적 의미에는 '조선시대, 정2품 또는 종2품 이상의 고관과

          사헌부사간원우두머리들이 추천하여 뽑던 청렴한 벼슬아치'란 뜻도 있다.

          이를 역설적으로 풀어보면 그만큼 조정의 관리들 중에서 양심있고 청렴한 염관(廉官)이

          적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수백 년 전에서조차 이런 상(賞)을 통해서라도 백성을 잘 다스리는 착하고 어진 양리(良吏)를

          많이 만들어내고 싶은 간절한 국가적 소망이 깃들어 있었다.   

          청백리 정신은 선비사상과 함께 전통적 민족정신이자, 이상적인 관료상이기도 했다.

          조선시대의 청백리 제도는 중국 한나라의 염리제도(廉吏制度)를 본떠서 만든 것이다. 

          기록을 보면 조선 전기에는 의정부와 이조(吏曺)가, 조선 후기에는 비변사와 이조가 왕명에

          따라 정승급 관리들과 대간의 관리들의 추천을 받고 육조판사가 심사를 한 후, 임금의 재가를

          얻어서 청백리를 선발했다. 

          이 때의 선발기준은 청백(淸白), 근검(勤儉), 경효(敬孝), 후덕(仁義) 등의 덕목이다.

          청렴함과 효성, 성격의 자애로움을 근거로 뽑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가장 중요한 요건은 타인에게 폐를 끼치지 않고, 깨끗하고 검소하게 살아온 삶의 검박함이다.

          업무 관련자들로부터 대접을 받지 않거나 부를 축적하는 데에만 혈안이 되지 않은, 청렴함

          가장 큰 주안점으로 뽑았다. 

          생존시 청백리로 뽑힌 관리들에게는 재물을 상으로 내리거나 승진을 시켜주었다.

          이미 졸한 이들은 자손에게 재물을 내리거나 관직에 등용시켜 주었다.

          <속대전>에는 2품 이상 관원의 천거로 자손을 관직에 의망(擬望)하도록 규정돼 있다.

          허나 '이익'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뇌물이 유행해 청백리 후손들에게 벼슬이 돌아갈 

          여지가 없었다."고 개탄했다.

          조선 말기에 성행한 매관매직 때문이었다. 

 

          기록을 보면 조선 전기에는 공정성을 유지해 합당한 사람들을 청백리로 뽑았고, 당쟁으로

          매우 시끄럽던 조선 후기에는 당파에 따라 편파적인 청백리 심사를 우려해 최소한의 인원만

          청백리로 뽑았다. 

          조선 말기인 19세기 이후에는 탐관 오리의 폐해가 심각해 청백리를 선발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의 <전고대방(典故大方)>에는 청백리로 219명이 기록돼 있고, <청선고(淸選考)>에는

          186명의 이름이 기록돼 있다.

          이를 볼 때, 조선조 500여 년 동안 청백리로 평균 200명이 기록돼 있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이들 대부분을 조작 또는 과장된 청백리로 본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조선시대의 명재상으로 이름 높은 황희(黃喜)이다. 

          <세종실록>에서 사관들은 황희의 별명을 '황금 대사헌'으로 불렀다.

          지금으로 치자면 '황금 검찰총장'이다. 

          심지어 '형옥(刑獄)을 팔았다.'는 기록까지 남아있다. 

          이는 형사사건 당사자로부터 뇌물을 받고 검찰총장이 재판에 개입해 범죄자를 무죄로

          만들거나, 피해자를 오히려 가해자로 둔갑시켰다는 의미이다. 

          또 황희는 범죄를 저지른 유부녀를 집에 숨겨주고 오랫동안 내연관계를 맺다가 적발되기도

          했다.

          실록에 나타난 그의 행적은 한마디로 온갖 부정부패의 종합 셑트라고 할 수 있다.

          엄청난 부를 축적했던 '황희'가 오랫동안 청백리 명재상으로 전해져 내려온 것은, 세종의

          총애와 그의 철저한 이미지 관리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문가들은 기록에 남은 사람들의 약 10분의 1 정도인 20명 정도를 진정한 청백리로 보고

          있다.

          이는 지금의 장관급인 판서를 10~20년 동안 했어도 가난을 면치 못한 관리들을 계산한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영의정에 이조판서, 대제학에 중용됐었으면서도, 퇴직할 때는 홀로 걸어서

          집으로 돌아갈 정도로 청빈한 삶을 산 관리들도 분명 존재했다.

          청백리들은 대를 이어 수대에 걸쳐 관직에 중용돼 있었어도 가난을 면치 못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들은 비록 후손에게 많은 재산을 남기거나 부귀영화를 누리지 못했지만, 대신 진정한

          청백리로 깨끗하고 아름다운 이름을 역사 속에 영원히 남겼다. 

          평생 공직에 몸담았던 사람이 처자식을 호의호식시키고, 막대한 부을 축적해 늙어서까지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얼굴이 기름기로 번들거린다면 이는 매우 부끄러운 일이다.

          결국 관리들이 어느 쪽의 인생을 택하느냐... 하는 것 또한 온전히 자신이 선택할 몫이다.

          아울러 선택에 대한 책임도 온전히 자신이 짊어지게 된다.

          이는 사바세계(娑婆世界)나 영적인 세계에서도 똑같이 적용된다.      

          조선 후기에 들어서며 청백리와는 거리가 먼 탐학한 오리들의 횡령과 수탈 때문에 민초들의

          삶은 낭길에 매달렸다.  

          <홍경래의 난>이나 <진주민란> 같은 민란이 전국적으로 일어나 국가가 소용돌이에 휘말려

          위기에 처한 것도 바로 탐학(貪虐)한 관리들 때문이었다.        

  

          공직자가 지녀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조선조 최고의 경세가(經世家)였던 잠곡 김육

        (金堉)은 <애물제인(愛物濟人)> 정신을 주장했다.

          애물제인이란... "만물을 사랑하여 사람들을 구제하라."는 뜻이다.

          그의 '애물제인'은 어렸을 때 소학(小學)을 읽었던 데서 비롯됐다.

          이 말은 정자(程子)가 한 말이다.

          공자(孔子) 또한 공직자들이 귀감으로 삼아야 할 정신을 이렇게 가르쳤다.

                                                 敬事而信  節用而愛人 

                            (일을 공경히 하여 미덥게 하고, 용도를 절약하여 백성을 사랑하라!)  

            이게 바로 공직자에게 요구되는 노블레스 오블레주(noblesse oblige)인 셈이다.

 

  

            *  이 글  저작권의 보호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