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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과 조희룡의 묵란도(墨蘭圖)

아라홍련 2013. 2. 2. 03:23

 

    

 

        "대저 난을 그리고 돌을 그리는 까닭은, 그것으로 천하의 수고로운 사람들을

         위로하려 함이다." <조희룡(趙熙龍)>

 

우봉 조희룡은 철종 신해년인 1851년 음력 6월, 진종(眞宗)의 조천에 반대하는 예론

(禮論)에 연루됐다.

이는 철종의 정통성을 부인하는 것과 마찬가지 의미였다.

그는 추사 김정희, 이재 권돈인의 복심(腹心)으로 지목되어, 절해고도인 임자도로

유배를 갔다.(철종2년 6월9일 갑자 <조선왕록> 48, "철종실록"권 3,562쪽 상~하)

한데, 그가 그린 홍백매도팔폭병풍(국립박물관 소장)이 바로 150여 년 만에 철종을

재조명한 역사소설 이몽(異夢)의 표지 그림으로 나타났다.  

(블로그글 "이몽의 표지 비하인드 스토리" 참조)

 

그가 임자도로 유배를 가던 때의 나이는 63살이었다.

김정희의 복심으로 지목된 것을 볼 때, 둘의 관계는 매우 친밀했던 것으로 보인다.

허나 그는 유배 당시 김정희의 편지를 받은 적도, 추사에게 편지를 보낸 적도, 또

추사를 그리워한 흔적이 없다.

혹여 여항인(閭港人)과 권문세도가 사대부와의 넘을 수 없는 벽이 있었던 건 아까?

 

하지만 조희룡은 본래 중인(中人)이 아니었다.

조희룡은 조선 개국공신 조준(趙浚)의 15대손이다. 

선대는 양반가문이지만, 조부 때부터 벼슬과 멀어져 여항인이 되었다.

조선시대에는 선대에 2대에 걸쳐 벼슬한 사람이 생기지 않으면 저절로 양반이 아닌,

여항인이 되었다.

한번 양반가문이라고 영원히 양반노릇을 했던 게 아니다. 

여항인이란 '여염의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벼슬을 하지 않은 일반 백성을 일컫는 말이다. 

조선시대에 사대부가의 자제들이 기를 쓰고 공부한 것도, 또 불법과 청탁을 자행

하면서까지 과거에 급제하려 필사적으로 안간힘 쓴 것도 결국은 양반가문을 유지하기

위해 사로(仕路)에 나서기 위한 방법이었다.

 

조희룡은 둥근 머리와 모난 얼굴, 가로 찢어진 눈과 성긴 수염에, 키는 180이

넘고 몸이 여위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오세창'은 우리나라 최초의 미술평론집인 <근역서화징>에서 우봉이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마치 학이 가을구름을 타고 펄펄 나는 듯하다.'고 묘사했다.

평생 매화 그림을 그리고 시서화(詩書畵)에 모두 능했던 조희룡...

그의 문학예술은 19세기 여항문화의 대미이자, 동시에 20세기 새로운 문화예술의

시작점이라고 할 수 있다. 

세상엔 인연법이 있어서 우봉 조희룡은 철종의 선왕인 헌종 대에는 총애를 받았고,

후대왕인 철종 대에는 두번이나 화를 입을 뻔 했다.

신해예론 때는 실제로 유배를 갔고, 또한번은 철종 대에 헌종 때의 일이 뒤늦게

거론돼 화를 입을 뻔 했지만, 잘 무마되었다.  

 

조희룡이 유배 중일 때 가장 편지를 많이 주고 받은 이는 석경 이기복이다.

그는 조희룡보다 6살이 더 많았지만, 가장 마음을 많이 나눈 평생 지기(知己)였다.

의원으로 찰방 벼슬을 지낸 석경은 헌종이 위중할 때 올린 약이 효험이 없다는

이유로 강진 고금도로 유배를 갔다가 다음 해인 1850년, 유배지에서 풀려났다.

조희룡은 임자도에서 멀지 않은 남해의 고금도를 매일 바라보며, 일 년 전 석경이

유배 생활했을 때를 추억하며 그를 몹시 그리워하곤 했다. 

조희룡이 석경에게 보낸 답장을 보면, 당시의 심정이 물에 비추듯 보인다.

 

     선생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눈빛이 횃불같이 빛나, 몇 리나 비출 정도이니

         모르는 사람은 이 말을 비웃을 것입니다.....

         저의 객지 상황은 썩어빠진 밥과 같아 어느 것이 기장 맛인지, 보리 맛인지 

         알지 못합니다.

         알 수 있는 한 가지 맛이라고는 더러운 냄새가 사람들의 코를 가리게 하는

         것뿐입니다.

         저는 날마다 바닷가에 가서 물을 구경합니다.

         맑고 넓은 것은 그 본성이요, 용솟음치고 급하게 흐르며 파도치는 것은

         우는 것으로, 그 지형에 따라 그렇게 되는 것인가 봅니다. 

         저의 사정은 이 막다른 지점에 이르러서 어찌 울지 않고 견딜 수 있겠습니까?

         울음이 변하여 취함에 이르고, 취함이 변하면 잠에 이릅니다.

         잠이 변하며 꿈에 이르고, 꿈이 변하면 진경(眞境)이 되어 선생과 손을 맞잡고

         산사와 야외의 별장으로 노닐며 지었던 기유(記遊)의 시편들이 역력하게 기억납니다.

         이는 곧 인생의 꿈속의 꿈이라, 어느 것이 꿈이 되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알 수 없지만,

         저는 장차 꿈과 현실 사이에서 애오라지 세월을 마치려 할 뿐입니다.

         예를 갖추지 못하고 이만 줄입니다.

                                                  <적독(赤牘) 중에서>

 

 

인생의 꿈속의 꿈... 몽중몽(夢中夢)

어느 것이 꿈이 되고, 어느 것이 현실인지 알 수 없다...

꿈속에서 꿈 이야기를 한다... 몽중설몽(夢中說夢)

혹여, 어디에서 들어본 얘기 아닌가?

바로 역사소설 <이몽(異夢)>에 나오는 이야기들이다.

정말 희한하고도 놀라운 일이다.  

그러나 그냥 우연일 뿐이다.

나는 이몽이 소설이기 때문에 추사(秋史)와 이재(彛齋)만 언급하고, 조희룡은

따로 언급하지 않았다. 

한데, 평소 우봉의 홍백매도팔폭병을 눈여겨보던 북디자이너가 이몽의 작품

이미지와 잘 맞는다는 이유로,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어럽게 허락을 받아 역사소설

이몽의 표지로 작품화했다.

이 또한 우연한 일이다. 

그리고 철종의 즉위를 인정하지 않아 유배까지 떠났던 우봉은, 150여 년 만에

철종을 재조명하는 책의 표지로 나타났다.

철종과 우봉이 역사소설 이몽(異夢)에서 맞닥뜨린 것이다.

이 희한한 인연법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다.

     

우봉 조희룡은 2년 후인 1853년, 신해예론과 관련된 유배가 풀려 한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유배지에서 쓴 편지들을 묶어 <수경재해외적독(壽鏡齋海外赤牘)>이란 책을

펴냈다. 일종의 서간문이다.

적독(赤牘)이란 척독(尺牘)과 같은 어휘이다.

서로 떨어져 있는 상대에게 자기의 안부나 소식, 하고싶은 말을 전하기 위해 써서

보내는 글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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