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은 밤, 창 밖 설경(雪景)을 바라보다 문득 생각나는 詩...
음악들
너를 껴안고 잠든 밤이 있었지.
창밖에는 밤새도록 눈이 내려 그 하얀 돛배를 타고
밤의 아주 먼 곳으로 나아가면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에 닿곤 했지.
산뚱반도가 보이는 그곳에서 너와 나는
한 잎의 불멸, 두 잎의 불면, 세 잎의 사랑과, 네 잎의 입맞춤으로 살았지.
사랑을 잃어버린 자들의 스산한 벌판에선
밤새 겨울밤이 말 달리는 소리 위구르, 위구르, 들려오는데
아무도 침범하지 못한 내 작은 나라의 봉창을 열면
그때까지도 처마 끝 고드름에 매달려 있는 몇 방울의 음악들...
아직 아침은 멀고, 대낮과 저녁은 더욱더 먼데
누군가 파뿌리 같은 눈발을 사락사락 썰며 조용히 쌀을 씻어 안치는 새벽,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
- 박정대 -
눈 내리는 밤
나는 지금 내리는 눈을 보고, 눈은 저를 쳐다보는 나를 보며 내리고 있네.
눈은 처음엔 하염없는 영혼이었네.
저도 그것을 알고 있다는 듯 지금 내리는 눈은 제 몸을 숨기며 내리고 있네.
육체를 가졌다는 것이 무슨 부끄러운 일이라도 되는 양 그렇게, 그렇게,
내리는 눈을 나는 하염없이 바라보고만 있네.
고요히 음악만이 살아있는 이 시간을 나는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가끔씩 내가 이토록 고요히 살아있는 시간을 도대체 무엇이라고 부르면 좋을까.
나는 내가 살고 싶은 시간을 '눈 내리는 밤'이라고 부르면 안되나.
차가운 시간 위로 내려와 대지의 시린 살결을 덮어주는 그대 따스한 숨결을
나는 지금 음악처럼 듣고 있네.
세상의 후미진 곳에 서 있는 겨울나무들은 이제 마지막 남은 손바닥을 내밀어
눈물로 젖어드는 하늘의 사랑을 받아들이고 있네.
이런 걸 참 무모한 사랑이라고 부른다면, 눈 내리는 밤마다 나는 참으로
무모해지고만 싶은데...
나는 지금 내리는 눈을 보고, 눈은 저를 쳐다보는 나를 보며 내리고 있네.
무모한 사랑을 확인이라도 하듯 우리는 지금 소리 없는 음악소리를 내고 있네.
서로를 연주하는 마음이 세상의 어떤 음악보다 더 깊은 이 시간...
눈에 젖은 나무들이 비로소 차분히 저희들의 기타 줄을 고르고 있는
이 눈 내리는 밤에.
- 박정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