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선견지명이 있는 것인가?...
얼마전 설국(雪國)이라는 글을 쓰면서, 대선을 앞두고 이전투구를 벌이는 정치꾼들과 정치꾼
희망자들의 행태를 개탄하며 오탁악세(五濁惡世)에 관해 언급한 적이 있었다.
한데, 비슷한 내용인 거세개탁(擧世皆濁)이 2012년 올해의 사자성어 1위로 뽑혔다.
'올해의 사자성어'는 매년 12월, 교수신문에서 열흘간 교수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여
한 해를 상징하는 사자성어를 선정한다.
뜻을 살펴보면, 한 해 동안 우리나라가 어떻게 돌아갔는지를 대략적으로 알 수 있다.
들 거(擧), 세상 세(世), 다 개(皆), 흐릴 탁(濁)...
온 세상이 높고 낮음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바르지 않고 탁해, 홀로 깨어 있기 힘들다는
뜻이다.
정치인, 지성인, 국민은 물론 남녀노소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생각과 언행이 올바르지 않아,
제 정신을 가지고 정체성을 지키며 사는 사람들이 홀로 깨어있기 힘들 정도로 삶이 고달프고
힘들다는 의미이다.
한마디로 위정자와 지성인, 국민, 모두의 자성을 촉구하는 메세지이다.
거세개탁은 초나라의 충신 굴원(屈原)이 지은 어부사(漁父辭)에 나오는 내용이다.
모함으로 벼슬에서 쫓겨난 굴원이 초췌한 얼굴로 어느날 강가를 거닐며 시를 읊고 있었다.
그를 알아본 늙은 어부가 쯧쯧, 혀를 차며 "어쩌다 그 꼴이 됐느냐."고 물었다.
이에 굴원이 답했다.
온 세상이 탁하고 흐린데 나만 홀로 맑고, 뭇 사람이 다 취해 있는데
나만 홀로 깨어 있어서 쫓겨났습니다.
굴원의 이 기막힌 말에서 '거세개탁'이라는 사자성어가 유래됐다.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객관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사람들에겐 작금의 정치판이 바로
말세이다.
그동안 수많은 투표를 했지만, 이번 대선처럼 혼탁하고 많은 후유증을 남겨 대한민국 국민
전체에 분열과 갈등을 조장한 적은 없었다.
또 선거가 끝났음에도 권력을 꿈꾸며 기득권을 차지하려는 개인의 이끗과 탐욕, 허세, 허명
(虛名)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 좌충우돌하며 아직도 세상을 휘젓고 있다.
권력은 꿈꾸는 것만으로도 세상 어느 것과도 견줄 수 없는 강한 흡인력이 있다.
더구나 한번 권력을 맛본 자는 절대로 손에서 놓지 못할 정도로 중독성이 강하다.
세상이 혼탁한 것은 바로기득권을 가진 권력자들과, 권력을 꿈꾸는 자들의 횡포 때문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생은 기본적으로 번뇌를 가지고 살기 때문에 사회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맑지 못한 세상이다.
이를 다섯 가지의 탁함으로 분류해 오탁악세(五濁惡世)라고 부른다.
첫 번째, 겁탁(劫濁)은 시대가 탁한 것을 말한다. 환난이 그칠 사이가 없어 한 시각이라도
편안하고 즐겁게 지낼 때가 없는 사회악을 말한다.
두 번째, 견탁(見濁)은 삿되고 악한 사상과 견해를 가진 자들이 세력을 얻어서 돌아다니고,
올바르고 착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그 틈에서 밀려나가는 세상을 말한다.
올해의 사자성어로 왜 '거세개탁'이 선정됐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세 번째, 번뇌탁(煩惱濁)은 자기 것은 아끼고 남의 물건은 탐내며, 자질과 실력은 돌보지 않고
권세와 영예 등을 욕심 내어 갖은 술수를 부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상대방을
원망하고, 다른 이들을 중상모략하기를 일삼는 무리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을 말한다.
네 번째, 중생탁(衆生濁)은 사람들의 자질이 극도로 저하돼 견탁의 세상을 좋아하고, 번뇌탁의
세상에 사로잡혀 인간의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득세를 하는 세상을
말한다.
다섯 번째,명탁(命濁)은 말세가 다가와 인간의 탐욕이 낳은 악업이 늘어남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 창세기에 기록돼 있는 인물들의 평균 수명은 천년이다.
아담은 130살 때 셋째 아들 셋(Seth)을 낳고 800년을 더 살아 930년을 살았고, 셋은 105살에 에노스
(Enosh)를 낳은 뒤, 912살까지 살았다.
에노스는 90살에 게난(Cainan)을 낳은 뒤 905살에 죽었고, 게난도 910살까지 장수를 누렸으며,
그의 아들 마할랄렐(Mahalol-el)은 895살에 죽었다.
또 마할랄렐의 아들 야렛(Jared)은 962살까지 살았고, 야렛은 162살에 에녹(Henoch)을 낳았다.
아담의 7대손인 에녹은 65살에 무두셀라를 낳은 뒤 계속 자녀를 낳으며 365년을 산 뒤, 순결한
신앙심을 인정받아 하나님과 함께 승천했다.
므두셀라는 족장들 중 가장 오래 산 인물로 969살까지 살았고, 180살 때 라멕(Lamech)을 낳았다.
라멕의 아들로 아담의 10대손인 노아의 방주로 유명한 '휴식'이라는 뜻의 노아(Noah)는 950살까지
살았다.
하지만, 지금은 최고 권력자나 엄청난 부를 축적한 재벌이라도 언감생심 100세를 넘기지 못한다.
내가 아는한, 이번 대선처럼 선거 후에까지 전국민적으로 분열과 갈등, 상처가 극심한 적은
없었다.
나는 근본적으로 권력 자체를 비판하기 때문에, 내 주변엔 극우나 극좌에 속한 사람이 단 한 명도
없다.
우리는 극우도 극좌도 정상적인 신념으로 보지 않는다.
중용과 중도에서 벗어나 광폭한 이념에 사로잡혀 무조건 상대방을 물어뜯으며 싸우기 때문이다.
동서고금의 모든 성현들은, 극단적인 이념에 치우쳐 자신만 옳다고 생각해 신념이 다른 사람들
에게 '광분하며 증오하는 삶은 잘못 됐다.'고 가르쳤다.
이런 행태야말로 가장 비민주적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현자(賢者)들은 그런 사람들과 가까이하지 말고 조심하라고 경계시켰다.
한데도 나이든 사람들을 무조건 보수주의자로 매도하고, 인터넷과 트위터엔 장년층과 노년층을
폄하하고 모욕하는 부도덕한 패륜이 난무하고 있다.
어떤 이가 자기 아버지와 대판 싸웠다며 아버지를 모욕하는 듯한 트윗을 남기자, 20대 여자 독자
한명은 이에 용기를 얻고 주말에 아버지와 대판 싸운 뒤 이틀을 찜질방에서 보냈다.
부녀는 지지하는 후보가 다르다는 이유로 대선 전부터 말을 섞지 않더니, 대선 후에도 화해하지
못하고 설전을 벌이다가 결국 폭발한 것이다.
문제는 이 뿐만이 아니다.
진보와 개혁을 꿈꾸는 수많은 젊은이들이 극우 보수주의자들로부터 빨갱이로 매도되고 있다.
이들은 빨갱이도, 종북도 아니다.
나는 순수한 젊은이들을 이념과 정의라는 이름하에, 자신의 영웅주의나 권력에 대한 야망은
그림자 속 깊이 감춘 채, 이들을 선동하고 세대 간의 분열을 획책하는 일부 사람들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
누가 정권을 잡건 민초들의 삶은 별로 달라지지 않는다.
역대 여야가 각각 정권을 잡았을 때의 삶을 한번 살펴보라!
권력자들의 삶은 늘 기하급수적으로 풍요해졌고, 국민들의 삶은 언제나 팍팍하고 숨차며
힘들었다.
만일,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정권을 잡으면 우리나라가 금방 이상향으로 변할 것으로 생각
한다면 그건 지나치게 순진하거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동화 속의 세상을 꿈꾸는 것이다.
... 그런 세상은 지구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동화는 상상의 세계 속에만 있을 뿐이다.
세상 어느 곳에도 이상향은 없다.
지구라는 별 자체가 유토피아를 허락하지 않는다.
이 사실을 이성적, 객관적으로 인식해야 이념에 휘둘리지 않고 균형을 잡아 부화뇌동하지
않는다.
부디 위정자들이 사심과 탐욕을 버리고 민심을 잘 읽어, 국민이 편하게 살 수 있는 상식적인
정치를 해주기만을 간절히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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