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중기 이후 왕족과 특권층, 부유층에 속한 사람들은 하루에 7번 식사를 했다.
"대궐에서 왕족의 식사는 고래로 하루에 5번이다."라고 적힌 <영조실록>의 내용과 실질적인
세간의 식사 행태가 달랐다는 뜻이다.
여기서 상위층, 특권층은 왕족과 재상 등 고위 관료들을 의미한다.
부유층은 주로 중인(中人) 중 밀무역을 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역관들을 말한다.
<사옹원>에서 다루었던 궁중의 음식을 담당했던 숙수들인 종6품인 재부, 종7품인 선부,
종8품인 조부, 정9품인 임부, 종9품인 팽부도 조리 기술을 가지고 있는 중인에 속하고,
어의인 의관(醫官)들 역시 중인이다.
조선 제 21대 왕인 영조 때의 실학자 성호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피폐가 아직 사라지지 않아 백성들의 삶이 힘겹고, 정쟁으로 인해 민초의 삶이 낭길에
매달려 있는 터에, 일부 특권층과 부유층에서 하루에 7번이나 식사하는 것을 이렇게 탄식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음식을 가장 많이 먹는다.
최근 우리나라 사람 가운데 표류해 유구국(琉球國:오키나와)에 도착한 자가 있었다.
그 나라 사람들이 비웃으면서 그에게 말하기를 "너희 나라 풍속에 항상 큰 사발에
밥을 퍼서 쇠 숟가락으로 푹푹 퍼먹으니 어찌 가난하지 않겠는가?"라고 하였다.
그 사람은 아마도 전에 우리나라에 표류해와서 우리의 풍속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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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사람들은 새벽에 일찍 일어나 흰죽 먹는 것을 조반이라 하고, 한낮에 배불리 먹는 것을
점심이라 한다. 부유하거나 귀한 집에서는 하루에 일곱 차례 먹는데, 술과 고기가 넉넉하고
진수성찬이 가득하니 하루에 소비하는 것으로 백 사람을 먹일 수 있다.
옛날 하증(何曾)처럼 집집마다 사치하니, 민생이 어찌 곤궁하지 않겠는가?
매우 탄식할 만한 일이다.
'하증'은 중국 진(秦)나라 때 사람으로, 하루에 1만 전(錢)의 음식을 소비했다고 <하증열전>에
기록된 사람이다.
이익이 삶을 영위했던 시기는 동서분당이 남인, 북인, 소론, 노론의 사색당쟁으로 바뀌면서 노론이
주도 세력으로 떠오르던 시기이다. 정쟁으로 정치 기강이 극도로 문란해져 탐학한 지방관들이
민초의 등골을 빼먹는 가렴주구가 한창 심화되던 시기이다.
'이익'은 민생은 돌보지 않고 당쟁에 휘말려 권력싸움에 몰두하는 조정의 관리들을 보며 신물이 나
관직의 길과 절연한 뒤, 평생 초야에서 학문 연구와 후학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했다.
그런 그에게, 하루에 일곱 번의 끼니를 먹는 특권층과 부유층의 세태는 가히 개탄할 만한 일이었다.
거기다 조선사람들이 워낙 음식을 많이 먹는다는 말이 외국에까지 소문이 난 터라 '이익'의 실망감은
더욱 컸을 터였다.
왕실에서의 식사는 기본적으로 7식이다.
1) 1식, 조반(早飯) : 아침 6시~7시 사이에 먹는 죽상을 말한다.
초조반(初早飯)으로 죽상인 조죽(早粥)에 해당한다.
2) 2식, 조반(朝飯) : 아침 9시~10시 사이에 먹는 아침밥을 말한다.
3) 3식, 다담(茶啖) : 오전 11시~12시 사이에 먹는 반과상(飯果床).
국수(麵)를 곁들인 술안주상을 말한다.
4) 4식, 중반(中飯) : 오후 1시~2시 사이에 먹는 점심밥을 말한다.
5) 5식, 별다담 : 오후 3시~4시 사이에 국수를 곁들인 술안주상.
6) 6식, 석반(夕飯) : 저녁 5시~6시 사이에 저녁밥을 말한다.
7) 7식, 다담(茶啖) : 저녁 8시~9시 사이에 국수를 곁들인 술상이다.
정조대왕의 어머님이신 혜경궁 홍씨를 위한 환갑연 때의 식사를 정리한 <원행을묘정리의궤>를
보면, 화성 현륭원에서 진찬(進饌)을 올릴 때 혜경궁 홍씨에게 7식을 올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1609년 명나라 사신에게 제공한 식사를 비롯해, 1643년 명나라 사신 접대 기록인 <영접도감의궤>
에도 외국의 사신들에게 하루에 일곱 끼니를 접대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처럼 여러가지 기록들을 살펴볼 때 왕을 비롯한 왕족과 일부 특권층, 그리고 막대한 부(富)를
축적한 중인들은 하루 일곱 끼니를 먹었다.
허나 왕은 자연재해나 일식, 월식 등으로 백성들이 두려워하거나 고통스러워 할 때는 근신하는
의미로 가장 먼저 식사 횟수와 반찬수를 줄이는 모범을 보였다. 음악도 금지했다.
바로 감선(減膳)과 감악(減樂)이다.
전통시대에는 자연의 재해와 천재지변의 책임을 모두 왕이 떠맡았다.
왕이 부덕해 하늘에서 벌을 내렸다고 생각해 몸과 마음을 깨끗이 한 뒤, 소복으로 갈아입고 간절히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가뭄이 심해 하지(夏至)가 지나도록 비가 오지않으면 기우제(祈雨祭)를 지냈고, 입추(入秋)가
지나도 장마가 멎지 않을 때는 날이 개기를 기원하며 기청제(祈晴祭)를 올렸다.
또 동지(冬至) 후, 셋째 술일(戌日)인 납일(臘日)까지 눈이 내리지 않으면 왕은 흉년을 염려하여
눈이 내리기를 기원하는 기설제(祈雪祭)를 지냈다.
절대왕권을 가진 왕은, 그에 걸맞은 무한책임도 함께 지녔다는 뜻이다.
모든 왕이 하루에 일곱 끼니를 저수신 건 아니다.
검박하기로 소문난 영조 왕은 하루에 세 끼니만 드셨다.
영조가 조선시대 27명의 왕 중, 유일하게 보령 83세까지 장수를 누린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평생 소식과 거친 음식들을 먹었고 소박한 옷을 입었기 때문에 장수의 복록을 누릴 수 있었다.
반대로 세종대왕은 어려서부터 고기가 없으면 식사를 입에 대지 않아 늘 아버지 태종의 근심을 샀다.
때문에 종합병원이라고 할만큼 평생 질병에 시달렸다.
정조 또한 평생 검소한 의식(衣食)을 행한 근검함으로 유명하다.
정약용이 쓴 <부용정시연기(芙蓉亭侍宴記)>에는 이런 내용이 기록돼 있다.
우리 성상(聖上)께서는 뜻이 본디 공손하고 검소하기 때문에, 말을 달려 사냥하는 것을
즐기지 않고, 성색(聲色:음악과 여색)과 진기한 노리개를 가까이 하지 않으며, 환관과
궁첩(宮妾)이라고 봐주지 않는다.
다만, 진신대부들 중에 문학과 경술(經術)이 있는 자를 좋아하여 그들과 함께 즐긴다.
비록 온갖 악기를 베풀어 놓고 노닌 적은 없으나, 음식을 내려 주고 즐거운 낯빛으로 대해
주어서 그 친근함이 마치 한집안의 아버지와 아들 사이와 같았으며, 엄하고 강한 위풍을
짓지 않았다. 그러므로 신하들이 각기 말하고자 하는 것을 숨김없이 모두 아뢰니, 혹 백성
들의 고통과 답답한 사정이 있어도 모두 환하게 들을수 있으며, 경(經)을 말하고 시(詩)를
이야기하는 자도 의구하는 마음이 없어, 그 질정(質正)과 변석(辯析)하는 데에 성실을 다할
수 있었다.
관엄(寬嚴)하기로 이름난 정조도 총애하는 신하들을 대할 때는 한없이 자애로웠음이 연상돼
입가에 절로 미소가 번진다.
정조가 얼마만큼 근검절약한 삶을 살았는가는 여러 기록에 남아 있다.
어느 땐 너무 누추한 옷을 입고 있어 이를 본 신하들이 식겁한 적도 있고, 수라를 저수시는 것을
본 신하가 수랏상에 오른 반찬 종류와 수가 너무 적고 초라해 깜짝 놀랐다는 기록도 있다.
허나 총신들에게는 인애함이 그지없어 그들이 세간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속이거나 숨기지 않고
안심해 이야기를 전할 수 있었고, 왕은 그만큼 여염과 누항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잘 간파하고
대책을 마련할 수 있었다.
겨울이면 생각나는 일화 하나가 있다.
어느 겨울, 폭설이 내린 후에 거둥을 한 정조는 길에 눈이 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쯧쯧, 혀를 찼다.
백성들을 대체 얼마나 채치고 짓조르며 눈을 치우게 했으면 간밤에 눈이 왔음에도 눈이 하나도
안보이는가, 저어해서였다.
왕은 신하들에게 다시는 임금의 거둥시 백성들을 괴롭혀 눈을 치우지 않도록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 수원 화성행궁으로의 원행도 겨울을 피해 봄, 가을로 다녔다.
민초를 연민(憐憫)으로 바라보고, 애민사상이 왕의 가슴을 채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정조는 백성에 대한 사랑과 관심, 연민을 누구보다 많이 가지고 있던 성왕(聖王)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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