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주자적(近朱者赤), 근묵자흑(近墨者黑)
(붉은 색을 가까이 하면 붉은 물이 들고,
먹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검은 물이 들게 된다.)
어느날 부처께서 기사굴 山에서 정사(精舍)로 돌아오시다가 길에 떨어져 있는 종이를 보시고,
제자를 시켜 그것을 줍게 하신 뒤 "그것이 어떤 종이냐?"고 물으셨다.
제자는 냄새를 맡은 뒤, 이렇게 답했다.
"이것은 향을 쌌던 종이입니다. 잔향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 알 수 있습니다. "
다시 걸어가시던 부처께서 이번엔 길에 떨어져 있는 초삭(草索)을 보시고 제자에게 줍게 한 뒤,
그것이 어떤 줄이냐고 물으셨다.
냄새를 맡은 제자가 답했다.
"이것은 생선을 꿰었던 것입니다. 비린내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부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사람은 본래 깨끗하지만, 모두 인연을 따라 죄와 복을 부른다.
어진 이를 가까이하면 곧 도덕과 의리가 높아 가고,
어리석은 이를 친구로 하면 곧 재앙과 죄가 이른다.
저 종이는 향을 가까이 해서 향기가 나고, 저 초삭은 생선을 꿰어 비린내가 난다.
사람은 다 조금씩 물들어가며 그것을 익히지만, 스스로 그렇게 되는 줄 모를 뿐이다.
~* 팔만대장경 법구비유경(法句譬喩經)의 쌍서품(雙敍品) 중에서 *~
향을 쌌던 종이에서는 향냄새가 나고, 생선을 쌌던 냄새에서는 비린내가 난다.
만고의 진리이다.
어진 사람이 남을 물들이는 것은 마치 향냄새를 가까이 하는 것과 같다.
훈습(薰習)을 하듯, 저절로 나날이 지혜로워져 선함을 익히다가 마침내 아름답고 청결한
행을 이루기에 이른다.
사악한 사람이 남을 물들이는 것은. 마치 냄새나는 물건을 가까이하는 것과 같다.
차츰차츰 미혹당하고 동화되어, 서서히 허물을 익히다가 저도 모르게 결국 악한 사람으로
변한다.
세상 모든 만물은 자취와 흔적을 남긴다.
승강기를 탔을 때 치킨 냄새가 코 끝을 스치면, 방금 전 치킨 배달원이 승강했었음을
알 수 있다.
양념이냐, 프라이드냐까지 구분할 수 있다.
엘리베이터 안에 술냄새가 진동하면 방금 누군가 고주망태가 돼 올라갔음을 알 수 있고,
담배냄새가 매캐하면 조금 전 골초가 승강기를 타고 올라갔음을 알 수 있다.
발효된 악취가 나면, 누군가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승강기를 탔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인간의 경우엔 모든 게 더 명확하다.
얼굴과 표정을 보면 인생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어떻게 살아가고 있는지, 무엇을 선호하는지
고스란히 자취를 읽을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고유한 이미지를 가지고 있다.
이미지는 성형이나 보톡스, 시술로도 바꿔지지 않는다.
마음 순간순간에서 솟구치는 희노애락의 파동이 매순간마다 얼굴에 깊숙이 각인되기
때문이다.
얼굴 모습과 아우라처럼 번지는 이미지를 살펴보면, 그 사람의 성격과 영혼의 본질까지도
파악할 수 있다.
현재는 물론, 과거와 미래까지도 짐작이 가능하다.
그래서 흔히들 얼굴을 이력서라고 부른다.
미국 제16대 대통령 에이브러햄 링컨이 "나이 40이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스스로 말하지 않고 아무리 감추려 안간힘써도 얼굴과 언행, 이미지에서 느껴지는 파동만으로
눈 밝고 마음 밝은 일척안(一隻眼)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상대방의 삶과 철학, 욕망, 탐욕, 야망이
적나라하게 간파된다.
그 사람이 권력 앞에서, 또는 권력의 주변부에서 어떤 말과 행동을 취했었는가를 살펴보면
꽁꽁 숨겨진 탐욕과 야망, 드러나지 않은 속셈을 가장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인간성과 인생관, 가치관은 물론, 양심과 도덕성의 수준까지 짐작이 가능하다.
인간의 본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날 때가 바로 권력과 돈 앞이기 때문이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다.
사람은 권력과 돈... 이 두가지의 욕망만큼은 절대로 숨기지 못한다.
앞뒤를 재지 못하고, 체면과 염치도 챙기지 못한다.
단지 사람마다 그 욕망을 스스로 제어할 수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만 있을뿐이다.
여야를 막론하고 이번 대선의 권력에 올인한 뒤, 돌발적인 언행을 한 정치꾼이나 또는 정치꾼
희망자들을 보면 그 정답이 보인다.
정의의 이름 뒤에 숨겨져 있는 권력을 향한 집념과 탐욕에 얼룩진 명리(名利)에 대한 이그러진
욕망이 어둠의 그림자 속에 꽁꽁 숨겨져 있다.
다만 사람들이 그걸 보지 못하고, 읽지 못할 뿐이다.
진정 대의(大義)를 지키고자 한다면, 자신의 존재가 조직에 해를 끼친다면 과감히 권력의
주변부에서 멀어질 줄 알아야 한다.
그것이 양심이며, 정의의 시작이다.
이는 사랑과 같은 원리이다.
한데 자신을 돌아보지 못하고, 자신이 해가 된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한다면 이건 한마디로
광자(狂恣)한 것이다.
만일, 숨겨진 욕망과 야망을 타인이 읽어낼 수 있다는 걸 단 한번도 생각하지 않고 그동안
거침없이 말하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해 왔다면, 그건... 무지하고 어리석기 때문이다.
세상을 전혀 두려워하지 않는 자기애적 오만방자함으로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근주자적(近朱者赤), 근묵자흑(近墨者黑)...
이 글은 진(晉)나라 때 학자이자 철학자인 부현(傳玄)이 쓴 태자소부잠(太子少傅箴)이라는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붉은 색을 가까이 하면 붉은 물이 들고, 먹을 가까이 하는 사람은 검은 물이 든다는 뜻이다.
환경의 지배를 받는 인간은 자주 접하고, 자주 어울리는 사람과 같은 종류의 인간이 된다.
초록동색(草綠同色)이고, 유유상종(類類相從)이다.
한데, '부현'만 이런 말을 한게 아니다.
남제(南齊) 사람인 소갈량(蕭子良)이 편찬한 정주자(淨住子)에도 '근묵필치(近墨必緇)
근적필주(近赤必朱)'... 즉 "먹을 가까이 하면 반드시 검어지고, 주사를 가까이 하면 반드시
붉어진다."라고 쓰여있다.
가까이 접하고, 함께 어울리는 사람들에게 물드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이치이다.
때문에 고래의 모든 현자들은 타인과 소통이나 만남을 함에 있어 조심 또 조심, 신중히 경계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나쁜 곳에 물들지 않으려 스스로 노력하고 조심해야 비로소 성화즉향청(聲和則香淸) 형정즉영직
(形正則影直)... "소리가 조화로우면 음향도 청아하며, 외모가 단정하면 그림자 역시 곧아진다."
고 답했다.
동서고금의 모든 성현들이 훈회(訓誨) 했다.
인간은 자신의 그림자를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한다.
그림자 속에 감춰진 족적과 자취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그게 바로 개인의 역사이다.
자신의 영혼을 들여다 볼 줄 모르고, 그림자 속에 숨겨진 자신의 욕망을 정직하게 바라보지
못하면, 결국 자기만의 성(城) 안에서 스스로 편협한 세상을 꿈꾸며 교만하고 강려(剛戾)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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