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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남자, 내시(內侍)

아라홍련 2012. 12. 17. 00:41

 

 

 

 

역사소설 이몽(異夢)은 재미, 감동과 함께 그동안 잘못 알려진 여러 역사적 사실들을 바로잡은

데에 그 가치가 있다. 

다른 소설에서는 다루지 않은 조선시대의 새로운 궁중문화와, 풍속, 의례는 물론, 당시에 사용

하던 아름다운 순우리말을 많이 발굴해냈다.     

또 내시에 관해 잘못 알려진 부분들을 바로잡아 올바르게 인식시키는 데에도 일조를 했다.

내관(內官), 환관(宦官), 중관(中官), 환시(宦侍), 노공(老公), 시인(侍人), 내수(內竪)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불리던 내시들은 왕의 그림자 같은 존재이다.

성상(聖上)과 최근거리에서 근무하는 최측근 신하들로, 대부분 박물학자이자 전문직 관리이다.

한데도 그동안 사극이나 소설에서 흔히 내시들을 간신과 같은 캐릭터로 고정해, 여성 같은 음성을

내게 하거나, 불안하게 흔들리는 눈빛과 가벼운 걸음걸이, 변태스런 성격 등으로 희화화시켜 왔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조선의 내관들은 중국의 환관들과 달리, 음경은 놔두고 음낭만 제거했다.

이는 조선시대를 지배한 유교사상 중 하나인 '신체발부수지부모(身體髮膚受之父母)'와 연관이 있다.

때문에 결혼 생활이 가능했고, 내관의 부인들에게도 과거에 급제한 다른 관리들과 동일한 외명부

작위가 주어졌다.

또 고위 내시들은 첩을 여러 명 두기도 했다.

내관들이 남성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더 이상 만들어지지 않아 중성화 내지 여성화됐을 가능성은

높다.

허나 고래로 멀쩡한 남성들 중에도 간혹 여성 호르몬인 에스트로겐 수치가 남성 호르몬보다 더 높은 남자도 있고, 여성임에도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 수치가 여성 호르몬보다 더 높은 여자도 있다. 때문에 내시를 중성화가 아닌, 아예 여성의 캐릭터로 고정시키는 건 문제가 있다고 생각된다.

 

          멀리서 요란한 말발굽 소리가 들렸다. 점점 가까워진 말발굽 소리는 히힝, 요란한

          말 울음소리와 함께 정확히 해평루 앞에 멈췄다.

          왕이 보낸 파발이었다. 

          말에서 내린 자는 내시부 액정서 소속 액예(掖)였다. 

          액정서는 임금을 최측근에서 모시는 내시부 부서 중 하나로, 액정(掖庭)은 '액문 안에

          있는 정원'이란 뜻이다.

          궁중의 작은 문이 큰 문 안에 있듯, 내시는 임금의 겨드랑이와 같다는 의미이다.

          임금의 그림자이자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내관들이었다.

 

                                                                         이몽1권, 248p>  

 

 

내시의 유래는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 지방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6세기 경의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Herodotos)는 "페르시아 사람들은 환관을 믿을

수 있는 자들이라고 생각해 이용했다."거나 "그리스인들은 환관을 만들어 소아시아의 에베소서와

사르데스에서 페르시아 사람들에게 많은 돈을 받고 팔았다."고 기록했다.

이를 볼때, 내시 제도는 아프리카와 유럽, 아시아에서 폭넓게 시행되던 제도이다.

즉 기원전 페르시아와 그리스, 로마 제국은 물론, 인도 무굴 제국, 터키의 오스만 트루크 제국 등

서남 아시아, 이집트와 에티오피아를 비롯한 아프리카 일부 국가, 이탈리아을 비롯한 유럽 일부

국가, 유교 문화권인 중국과 한국, 베트남 등에서 시행되던 제도이다.

당시 왕조제도가 무르익지 않았던 일본은 환관제도를 시행하지 않았다.

내시 제도를 시행한 여러 나라들의 공통점은 모두 강력한 절대 왕권국가였다는 점이다.

바로 여기에서 환관의 필요성이 기인한다. 

왕의 입장에서는 자신의 여인들을 보호하기 위해 거세된 남자들이 필요해진 것이다.

자칫 다른 남자의 씨로 후사를 이을 경우, 나라의 정통성이 무너질 위기에 처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궁중에 있는 여인들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는 남자 구실을 하지 못하는 남자가 필요했다. 

 

중국 역사에서 환관의 기록이 최초로 보이는 것은 은(殷)나라 때의 갑골문자이다.  

전투에서 패한 전쟁포로들을 은나라로 데려와 강제로 거세 후, 궁궐의 환관으로 삼았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기록돼 있듯, 당시에 이미 고자를 만드는 궁형(宮刑)이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중국의 환관 역사는 기원전 2,000여 년 전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는 지금으로부터 약 4,000여 년 전에 이미 환관이 존재했다는 의미이다. 

허나 환관이 중국 궁중의 일원으로 정착한 것은 봉건제도가 확립된 주(周)나라 때부터이다.

중국 역사상 최초로 환관이 권력자의 모습으로 나타난 것은 춘추시대 최초의 패자(覇者)였던

제(齊)나라의 환관 '수조'이다. 

이후부터 환관의 영향력이 점점 커지기 시작한 기록들이 보인다.

 

우리나라 내시에 대한 최초의 기록은 <삼국사기>나 <신라본기> 등에 환수(宦竪)라는 이름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이들이 거세된 환관인지는 확인할 방법이 없다.

신라의 제도를 이어받은 고려시대의 내시제도는 의종조(毅宗朝) 이전까지만 해도 거세한 환관이

아닌, 가문과 학식과 재능이 뛰어난 문관들 중에서 선발된 왕의 최측근 총신들 집단이었다.

정5품이나 정7품 직에 있으면서 내시의 직무를 겸직했다.

이를 볼 때 삼국시대의 환관들은 거세된 내관이 아닌, 문관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조선시대가 되면 상황은 달라진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는 명나라와의 외교관계에서 환관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된다.

환관 정치가 성행한 명나라에서 사신으로 환관을 파견했고, 또 조선의 환관이 사신으로 명나라에

오기를 희망했기 때문이다. 태조의 고민은 여기에서 비롯됐다.

환관 제도의 악영향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궁궐의 여러 업무나 명나라와의 외교 문제를 볼 때

내관 제도를 시행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놓여졌다. 한마디로 내관을 필요악으로 인식한 것이다. 

특히 궁궐에 있는 왕의 여인들을 보호하고 정절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는 내시들의 필요성이

더욱 절실했다.  

그러나 조선엔 궁형이 없었으므로 고자나 뜻밖의 사고로 남자 구실을 못하는 사람들의 숫자가

적었다. 

결국 조선에서는 본격적으로  내시 제도를 시행해 인위적인 고자를 양산하기에 이른다.  

태조를 도와 조선시대 초기의 환관제도를 구상한 사람은, 고려 때 공민왕의 총애를 받아 판내부사

(判內府事)까지 올랐던 환관 김사행(金師幸)이다.

그는 원나라 황실에서도 일한 경력이 있어 누구보다도 환관 제도에 박식한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내시는 어떤 사람들이 됐을까?        

가난을 탈피하기 위해서, 또는 가혹한 병역이나 부역을 면하기 위한 방법으로 내시를 택한 사람들이

많았다. 또 다른 성(姓)을 양자로 들이기 싫어한 환관들이 먼 친척의 아이를 사다가 거세를 시킨뒤, 

환관들의 족보인 <양세계보(養世系譜)>에 올렸다.

양민들 중, 탐관오리들의 수탈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여 스스로 거세한 자궁(自宮)도 있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알려진 것과 달리, 천민뿐만 아니라  양반, 관노 출신까지 실로 그 출신 성분이

다양했다. <연려실기술>의 "환관"조를 보면, 인조조에 영남 사족 출신의 내시가 있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거세는 주로 여의도의 영등포쪽 샛강 못미처에 있는 용추(龍湫)라는 연못 옆에 있는 시술소에서

도자장(刀子匠)이 행했다.

비명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도록 주로 비오는 날, 우레가 칠 때 시행했다.

절단된 남근은 횟가루 속에 넣었다가 깨끗이 닦은 후, 다시 참기름 속에 넣어두었다.

참기름이 다 스며들고 나면 목갑(木匣) 속에 넣고 잘 밀봉한 뒤 환관의 사랑(舍廊) 대들보에 위에

보관했다.

그리고 내시가 죽으면 목갑을 내려 환관의 육신에 원래대로 바늘로 기워 맸다.

이 또한 유교적 관념 때문으로, 저승에 가서 조상들을 만날 때 온전한 남자가 되어 만나라는 뜻이다.

 

입궐해 출사(出仕)한 내시들에게는 끊임없는 공부와 훈련, 시험이 기다렸다.

정기적으로 <사서>나 <소학>, <삼강행실도> 등으로 시험을 본 후, 합격한 경우에만 승진시켰다.

내시들은 박물학에 대해서도 두루 공부해야만 했다.

세자빈 간택시, 대비나 중전 뒤에서 관상을 살핀 뒤 결과를 보고할 정도로 다방면으로 학식이

깊었다.

또 궁녀들에게 성의 기교를 가르치는 일도 내관들이 담당했다.

호위 내시들은 다른 무사들과 함께 무예를 부지런히 훈련해야만 했다.

하지만 내시의 가장 중요한 자질과 덕목은 단연, 왕의 비밀을 지키는 말조심 인내력이다.

주군을 위해 언제든 한목숨 바칠 충신의 준비가 돼 있어야만 했다. 

이들은 마늘이 들어간 김치도 먹지 못했다.

왕과 가장 근접거리에서 근무하므로 좋지 않은 입냄새가 날까 저어해서였다. 

대령내시(待令 內侍), 장번내시(長番 內侍)들은 향료를 씹으며 악취를 제거하려고 안간힘썼다.  

 

조선의 내관 제도는 삼국시대나 고려 때의 환관 제도와 판이하게 다른 특징이 있다.

조선은 내관의 신분을 확실히 보장해 주는 대신, 정치에 일절 관여하지 못하도록 원천봉쇄했다.

내시부 수장인 상선(尙膳)의 직급이 종2품에 머물게 한 것도 이 때문이다.

대신, 중국과 달리 조선은 내시들이 결혼할 권리를 주고, 가정을 꾸밀 수 있도록 제도적으로

뒷받침해줬다. 또 내관들의 처에게도 다른 관리들의 부인과 똑같이 외명부 작위를 주었다.

과거를 급제한 관리들이 아님에도, 업무의 중요성과 특성상 일종의 특혜를 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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