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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어화(解語花)

아라홍련 2012. 12. 11. 20:41

 

             만일, 이 세상에 책이 없었다면 이야기 거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책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니까 읽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이 세상에 술이 없었다면 아무런 재미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상에는 술이 있다.

             그러니까 마시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명산(名山)이 없다면 갈 곳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명산이 있다.

             그러니까 명산을 찾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꽃과 달이 없다면 아무 흥미거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꽃과 달이 있다.

             그러므로 꽃과 달을 즐기지 않으면 안 된다.

 

             만일, 재자가인(才子佳人)이 없다면 대화에 흥취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재자가인이 있다.

             그러므로 그들을 애호하지 않으면 안 된다.

 

             거울이 추녀의 적이 안 되는 것은, 거울에 감정이 없기 때문이다.

             만일, 감정이 있다면 틀림없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 것이다.

 

             이제 방금 사온 아름다운 화분의 꽃에게 조차 사람은 사랑을 느낀다.

             하물며 '말하는 꽃'에 대해서야 그 얼마나 깊은 애정을 느낄 것인가.

 

             詩와 술이 없다면 산수도 헛되이 있을 뿐, 가인과 벗하지 않으면 무슨 소용이랴.

 

                                                  ~* 임어당의 '자연의 즐거움' 중에서 *~  

 

 

해어화(解語花)는 '말을 알아듣는 꽃'라는 뜻이다.

흔히 꽃을 해어(解語)라고 부른다.

또 아름다운 여자를 뜻하기도 한다.

후대에 와서는 일반적으로 기녀를 해어화라고 불렀다.

이 말의 유래는 명황(明皇)인 당나라 6대 황제 현종이 양귀비를 가리켜서 "해어화"라고

부른 데서 기인했다.

개원유사(開元遺事)를 보면, 태액지(太液池)에 아름다운 백련이 다복하고 무성하게 

만발해 있자, 여색에 흠뻑 빠져있던 현종이 양귀비를 가리키며 좌우 대신들을 향해

귀비의 아름다움이 백련보다 한층 더 뛰어나다며,

   "백련(白蓮)의 아름다움도 말을 이해하는 이꽃에는 미치지 못하리라." 하고

말한 데서 해어화가 유래됐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영웅호걸 중에 아름다움에 항복하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래서 이 얘기는 이몽(異夢)에도 나온다.

 

        조카들이 고개를 갸우뚱거리자 조 대비가 풀썩거리며 웃었다.

          "상처 입은 주상을 위로할 여인을 준비하는 게 신하 된 자의 도리 아니더냐?  

           미색이 뛰어난 경국지색을 찾아라. 반드시 색에 능한 아이어야 한다."

        가슴을 쓸어내린 조카들이 겨우 구선왕도고를 목에 넘겼다.

          "곤전보다 더 예쁘고 똑똑한 아이를 찾아라! 특히 방사기교가 뛰어나야 한다.

           수강재 늙은이도 지금 나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터...기필코 선수를

           야 한다."

        한숨처럼 연기를 내뿜던 조 대비가 히죽히죽 웃었다.

        인간은 무쇠로 만든 칼은 막아도 육탄(肉彈)은 막지 못한다.

        36계 중 가장 성공률이 높은 게 바로 미인계이다. 한번 걸리면 좀체 빠져나가지 못한다.

        인간의 역사 이래로 모든 영웅호걸들이 여인의 덫에 빠져 미인의 관문 앞에서

        무릎을 꿇었다. 주상이라 하여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미인은 양날을 가진 칼과 같다.

        위로는 군주를 미혹하고, 아래로는 심복을 유혹한다.

        미인 한 명이 중무장한 수백의 군사들보다 훨씬 강한 건 바로 이 때문이다.

       

                                                                                   <이몽 2부, 114p>

 

아름다움의 위력은 정조도 알았다.

       "아름다움은 능히 적을 이긴다..."

정조가 이런 어록을 남길 줄 누군들 짐작이나 했겠는가?

고려 중기의 명문장가로 시풍(詩風)이 자유분방하고 웅장하기로 이름 높은 이규보(李奎報)가

기녀에게 준 시에는 이런 글이 남아있다.

 

        글하는 선비, 구습(舊習)으로 눈은 차가워(書生舊習眼猶寒)  

        화려하고 번화한 세간의 관습을 몰랐는데(未慣繁華爛慢問)

        해어화 보고 비로소 웃으니 (解語花來方始笑)

        잠시동안 국화와 이름을 겨루지 않네(不須須黃菊鬪名般)

 

세상 보는 눈이 매섭고 차가운 그였지만, 아름다운 여인를 벗하곤 비로소 웃음을 찾았다.

흔히들 미인을 표현할 때 이런 사자성어을 쓴다.

 

        침어낙안(沈漁落雁)...  물고기는 가라앉고, 기러기는 떨어지며

        폐월수화(閉月垂花)...  달은 구름 뒤에 숨고, 꽃은 부끄러워 고개를 숙인다.  

 

월나라의 '서시'가 호수에 얼굴을 비추니, 물고기들이 넋을 잃고 헤엄치기를 잊어

그대로 물에 가라앉아서 침어(沈漁)이고,

불초지 북방 흉노 장막으로 끌려온 '왕소군'이 고향을 그리워하며 거문고를 연주하니

그 모습에 반한 기러기떼가 날갯짓을 멈춰 하늘에서 떨어졌다고 해서 낙안(落雁)이다.

또 삼국지에서 동탁, 여포 등이 모인 연회에서 춤을 춘 '초선'이 밤하늘을 바라보니

그 자태가 너무도 아름다워 부끄러워진 달이 구름 뒤로 숨었으니 폐월(閉月)이요,

당 현종의 귀비인 '양옥환'이 꽃놀이를 가서 함수화 꽃잎을 만지니, 꽃이 부끄러워

고개를 숙여 피했다고 해서 수화(垂花)이다.   

이들은 중국의 4대 미인으로 꼽힌다. 

이몽(異夢)에도 세 명의 절세미인이 등장한다.

나합과 아지, 그리고 헌종의 후궁인 경빈 김씨이다.

나합과 경빈 김씨는 실존 인물로 워낙 자색이 출중하기로 유명했던 인물들이다.

 

    가장 큰 배 위로 화려한 비단옷을 입은 나합이 짙은 사향 냄새를 풍기며 나타났다.

    농염하고 뇌쇄적인 30대 초반 여인이었다. 금방 피어난 작약꽃 같은 미소가 번질

    때마다 양쪽 뺨으로 깊숙이 보조개가 패었다. 크고 그윽한 두 눈은 머루처럼 반짝였고,

    긴 속눈썹이 창백한 얼굴에 옅은 그림자를 드리워 안개 속에 핀 한 떨기 꽃처럼

    신비로웠다.    <이몽 1권, 278~279p>

 

아지의 미색 또한 절륜하다.

 

    갯버들처럼 잔약한 아지 얼굴은 백합처럼 여리고 청초했다.            <이몽 2권, 258p>

 

    입술을 앙다문 아지가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이 백옥 같은 얼굴에 빗금 같은

    그림자를 만들어, 눈빛이 흔들릴 때마다 파르르 그림자가 움직였다. <이몽 2권, 259p>

 

경빈 김씨의 미모도 절색이었다. 철종의 선왕인 헌종은 계비 간택에서 떨어진 경빈 김씨를

잊지못해 할머니인 순원왕후를 짓조르어 기어코 왕비의 예를 갖춰 후궁으로 맞아들였다.

그리고 단번에 부실(副室)의 최고 품계인 정1품을 하사했다.

 

    경빈이 백광사 당의 옷고름으로 눈물을 찍어 냈다. 요염함과 전아함을 동시에 지닌

    경국지색이었다.   <이몽 1권, 50p>

 

    수양버들처럼 하늘거리는 허리와 수선화같이 우아한 자태에 매료된 왕은 경빈에게 완전히

    침혹했다. 갓 올라온 연뿌리처럼 희고 매끄러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난초와 사향 냄새가

    코를 찔렀다. 왕은 계비인 중전 홍씨와 경빈이 마주치는 것을 막기 위해 동남쪽으로 멀리

    떨어진 8천여 평 대지 위에 5백 칸짜리 집을 지었다. 바로 낙선재였다.   <이몽 1권, 51p>

  

여기에서 난초는 지적인 아름다움을 상징하고, 사향 냄새는 교염(嬌艶)한 아름다움을 뜻한다.

이는 재색을 모두 갖춘 이상적인 미인을 의미한다.

현대에서 말하는 외형에 치우친 미적 기준과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요즘처럼 성형이나 보톡스, 두꺼운 화장으로 만들어지는 외장적 가치와 결코 견줄 수 없다.

영혼에서 우러나오는 평담함과 지성, 내면의 복욱한 향기가 아우라처럼 번져 외모와 

적절한 조화를 이룰 때 나타나는, 당당하고 연염한 진정한 아름다움을 말한다.

옛날의 가인(佳人)들은 재색을 겸비했던 인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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