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의원 사진>
어의는 내의원에 소속된 왕의 주치의이다.
한데, 역사왜곡으로 자주 지적되는 것 중 하나가 바로 어의의 위상이다.
드라마나 소설을 보면 어의들이 삼정승과 동등한 위치에서 반존칭의 말을 하거나, 심지어
삼공육경(三公六)을 제압하는 듯한 말투를 보이는 것을 종종 발견하는 수가 있다.
얼마전 끝난 한 드라마에서도 어의가 삼정승에게 "그랬소, 저랬소" 하는 말투를 사용하는
것을 보고 식겁한 적이 있다.
조선시대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일이다.
이는 심각한 역사왜곡이다.
작가들이 어의를 조선시대의 위상으로 파악하지 않고, 오직 임금의 주치의란 개념으로 단순히
최고위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발생한 오해이다.
어의를 생각할 때, 현대 의사들의 위상과 같은 개념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지금의 의사는 사회 최상위층에 해당하는 직업군에 속하지만, 조선시대의 어의는 양반과 천민의
중간층인 중인(中人)이었다.
엄격한 신분사회인 조선시대의 중인은 진신대부인 양반과 엄청난 신분의 차이가 있었다.
때문에 어의가 삼정승이나 고관들에게 위세를 거들먹거리며 하대를 하거나, 권력의 중앙에 선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오히려 왕이 승하했을 때 어의들에게 도의적 책임을 물어 즉시 하옥시키거나 삭탈관직하고, 한동안
유배에 처해지는게 어의들의 운명이었다.
조선왕조실록에서 왕의 훙어 후, 공식적으로 역의(逆醫)로 지목돼 어의가 처형된 예가 딱 두 번 있었다.
효종의 어의였던 신가귀(申可貴)와 독살의 논란이 일었던 정조의 어의 '심인'이다.
허나 이는 정조가 독살당했다는 뜻이 아니다. 도의적인 책임을 물어 처벌한 것이다.
학계 뿐만 아니라, 실록과 승정원 일기, 어의의 처방전, 정조가 직접 내린 처방전 등을 분석하며
오랫동안 정조의 독살설을 연구해 온 한의사들은 정조가 독살당하지 않았다는데에 이견이 없다.
조선시대에는 문과, 무과 외에 잡과(雜科)가 있었다.
주로 중인들이 응시하던 일종의 기술직을 뽑는 과거제도이다.
중인(中人)이라고 하면 역관, 의관, 음양관, 율관. 산원(算員), 화원, 약원뿐만 아니라 서리, 향리,
서얼 등이 포괄된다. 한마디로 잡과란 문,무과와는 별도로 의관, 천문, 풍수지리, 역관, 율관 등
기술관을 선발하던 제도이다.
<경국대전>의 잡과 분류를 보면 역과와 율과, 음양과, 의과, 그리고 후에 취재(取才)로 바뀐 이과가
있다. 통역관을 뽑는 역과(譯科)에는 한학(한어), 몽학(몽골어), 왜학(일본어), 여진학(여진어)이
있었고, 형량을 조율하는 등 법률 관련 일을 하는 율과(律科)가 있었다.
또 천문학과 지리학, 명과학의 음양과(陰陽科), 그리고 어의들을 뽑는 의과(醫科)가 있었다.
잡과는 현직관료 중에서 7품 이하가 응시할 수도 있었지만, 주로 서얼과 재가녀(再嫁女), 장리의
후손들이 응시했다. 1543년 중종 38년에 편찬된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에는 2품 이상 관원의
첩자손의 존속들이 응시할 수 있도록 명문화 돼 있다.
조선시대에는 문과나 무과에 응시하는 자격과, 잡과에 응시하는 사람들의 신분상 차별을 엄격히
구분했다는 의미이다.
문,무과와 잡과에 차별을 둔 것은 여러 사례에서 나타난다.
잡과는 식년시와 증광시에서 시행되었는데 초시와 복시만 있고, 임금 앞에서 최종시험을 보는
전시(殿試)가 없다. 또 과거에 합격했을 시 문과 합격자에게는 홍패(紅牌)를 주었지만, 잡과의
합격자에게는 백패(白牌)를 주었다.
뿐만 아니라 문,무과 합격자에게는 교지식(敎旨式)을 따라 왕의 도장인 어보(御寶)를 찍어주었지만,
잡과 합격자에게는 교첩식(敎牒式)을 기준으로 하여 예조인(禮曹印)을 찍어주었다.
잡과 합격자의 창방(唱榜)과 의례도 어전이 아닌, 예조에서 하고 유가(遊街)도 없었다.
유가란, 과거에 합격한 사람이 광대들을 데리고 사흘동안 풍악을 울리면서 거리를 돌며 시험관과
선배, 친척들을 찾아다니는 것을 말한다.
이를 보면, 조선시대 잡과에서 뽑은 어의들의 위상을 짐작할 수가 있다.
그렇다면... 작가와 독자들이 왜 어의를 삼공육경과 맞먹는 위세있는 인물로 오해하게 됐을까?
여기에는 이유가 있다.
흔히 약방, 약국, 내약방으로 불리는 내의원이 겸관제도(兼官制度)를 시행했기 때문이다.
옥체를 살피고 보호할 뿐만아니라 삼의원(내의원, 전의원, 혜민서) 등을 관장하는 내약방은
그 중요성 때문에 겸임제인 겸관(兼官)을 두었다.
겸관은 조선시대 관료제의 중요한 특징으로, 소수의 당상관이나 재상들이 여러 관서의 일을
책임 맡아 감독하는 것을 말한다.
내의원뿐만 아니라, 당상관이 없는 아문(衙門:관청)에서는 관서장 이외에 타 부서의 당상관
이상의 고관으로 제조를 임명해 관서의 일을 총괄 감독하게 했다.
때문에 내의원을 총괄하는 도제조(都提調)는 정1품인 영의정이 맡아 휘하에 제조와 부제조를
여럿 거느리고 그들의 활동을 규찰하는 일을 맡았다.
제조(提調)는 주로 정2품이, 부제조는 정3품인 도승지가 겸임했는데 이들 대부분 문관이다.
여기에서 '제(提)' 字는 "다스린다", "관리한다", "맡는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내의원의 도제조, 제조, 부제조를 당상관 이상의 고위 문관들이 맡다보니, 직제를 모르는
사람들이 이들을 최고위직 어의들로 착각하는 일이 생겨난 것이다.
관원과 서리 등 행정 실무진과 어의, 침의들로 구성된 내의원에서는 무슨 일을 했을까?
이들은 생각보다 훨씬 광범위한 일을 했다.
내의원 어의들은 도제조, 제조, 부제조를 따라 5일에 한 번씩 편전을 방문해 왕을 문진하거나
왕세자의 건강을 살폈으며, 왕과 왕세자, 내명부에게 필요한 치료와 탕약들을 조제했다.
전의원(典醫院)은 양반 계급의 의무(醫務)를 담당했으며, 궁궐 밖에 둔 혜민서(惠民署)에서는
무료로 가난한 백성들의 병을 치료하고, 약방기생들에게 침술을 가르쳤다.
또 왕실의 대표적 보양식이자 식치음식인 타락죽도 사옹원이 아닌, 내의원에서 어의들이 만들었다.
중요한 재료인 우유를 조달하기 위해 궁궐 살림을 담당하는 사복시 아래에 타락색(駝酪色)이라는
아문을 두고 낙산에서 소를 키워 우유를 진상했다.
타락(駝酪)은 우유의 옛 한자어로 돌궐 말이 어원이다.
내명부의 출산일이 다가오면 임시로 만들어지는 산실청(産室廳)도 내의원이 관장했다.
의녀나 약방기생을 궁궐에 둔 것도, 남녀유별로 인해 내명부 일을 여성이 직접 도울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 구선왕도고 같은 왕실의 계절별 약선음료를 만들기 위한 약재의 배합도 내의원에서 담당했다.
뿐만 아니라 동지 후 셋째 미일(未日)인 납일(臘日)에 만드는 납약(臘藥)이나, 왕이 연말에 총애하는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는 청심환이나 안심환, 소합환, 제중단, 광제환 등도 내의원에서 만들어 진상했다.
특히 조선의 납약은 중국 진상품으로도 가장 인기있는 물품 중 하나였고, 일본에서도 조선의 납약을
구하려고 애를 쓸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조선시대에는 역대 군왕들이 모두 약차를 즐겨 마셨고, 다례(茶禮)가 중요한 의식으로 시행됐다.
다례 준비도 사옹원이 아닌, 내의원에서 했다.
궁중다례는 태종 때 23회를 시작으로 고종 때까지 모두 2,000회 이상 실시되었을 정도로 범국가적인
행사였다. <조선왕조실록>과 <승정원일기>에 언급된 약차는 인삼차를 비롯해 감국차, 구기자차 등
모두 140여 종이나 된다.
현재 내의원 보춘정 앞에 모아놓은 석조유물 중 하나인 석조 화덕(*茶爐)은 내의원에서 탕약과 차를
달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 옆에 있는 석조수조(石彫水槽)는 화강암에 구멍을 파고 물을 담아 썻던
그릇인데 차나 탕약을 끓일 때 그릇을 씻는 함지박 대신 사용했거나, 약재를 빻는 절구로 사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 어의의 중요한 임무 중 하나가 바로 상분직(嘗糞職)이다.
즉 매일 왕의 똥맛을 보며 성상의 건강을 살피는 직책을 말한다.
이들은 똥맛으로 진단한 왕의 건강상태에 따라 내시부 수장인 상선(尙膳)을 통해, 왕의 수라를 만드는
사옹원에 수랏상의 요리 재료들을 조절하도록 권유했다.
이처럼 극진히 왕의 건강을 살폈음에도 왕이 승하하면 즉시 그 책임을 물어 하옥, 삭탈관직, 유배 등을
갔고, 실책이나 독살의 논란이 있으면 즉시 처형됐다.
... 이게 바로 조선시대 왕의 주치의였던 어의들의 잔인한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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