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설국(雪國)

아라홍련 2012. 12. 5. 17:22

이렇게 아름다운 설경은 오랫만에 봅니다.

베란다에서 내려다 보이는 아파트 정원은 온통 순백색입니다.

문득,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雪國)이 생각나는군요.

눈을 뒤집어쓴 장대한 활엽수들이 눈의 무게가 힘겨운듯 나뭇가지를 늘어뜨린 채 

위용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만추에 오색의 단풍을 자랑하다 헐벗은 나목들도 일제히 풍성한 흰옷으로 갈아입고

눈꽃을 만발한 채 고즈넉하게 서있습니다. 

세상은 온통 흰색 그림입니다.

그 위로 분설이 꽃잎처럼 난분분 내리고 있습니다. 

백설이 마치 오탁악세(五濁惡世)의 더럽고 추잡함을 모두 덮어버린 듯하여

잠시 다른 세상에 있는 듯한 평화를 느낍니다.

어제 대선후보의 토론을 본 뒤라 더 그런 생각이 나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설경을 바라보니 문득 한 음악이 간절히 생각나는군요.

Max Folmer의 "Lotus Moon"이란 음반을 CD 진열대에서 찾아냈습니다.

United부터 시작해서 World one, The creation, Global World, Pentagram 까지 들으니

도저히 커피의 유혹을 물리칠 수가 없네요.

결국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뽑아낸 뒤, 다시 베란다 창문으로 나갔습니다.

 

미동도 않고 눈을 뒤집어쓰고 있던 나무들이 일순간, 일제히 몸부림을 치며 

몸을 떨기 시작합니다.

바람이 휘몰아치자 큰 활엽수들이 소복히 눈을 얹은 채 둔중하게 좌우로 흔들거립니다.

가녀린 나목들은 온몸을 파르르 떨며 거센 눈보라를 일으킵니다.   

나무들이 군데군데 눈옷을 벗자 잠시 젖어있던 환상의 설국에서 빠져나와 다시

현실세계로 돌아옵니다. 

대선을 앞두고 권력과 탐욕에 올인한 사람들의 이전투구(泥田鬪狗)가 생각나 잠시 입맛을

쓰게 만드는군요.

흔히 정치판을 비유할 때 '이전투구'란 단어를 사용합니다.

이는 "진흙탕에서 싸우는 개"를 말합니다.

정적끼리의 싸움에 명분이나 정의, 예절은 사라지고, 오직 개인의 이끗과 자신이 속한 무리의

이끗, 탐욕과 허세, 허명(虛名)에 목을 매며 죽기살기로 상대방을 흠집내며 싸우는 정치인들에게

붙여진 이름입니다.

권력과 탐욕은 아편과 같습니다. 

한번 맛보면 절대로 손에서 놓을 수 없는, 중독성이 가장 강한 것이 바로 권력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생은 기본적으로 번뇌를 가지고 살기 때문에 사회적, 정신적, 물질적으로

맑지 못한 세상입니다. 이를 다섯 가지의 탁함으로 분류해서 오탁악세(五濁惡世)라고 부릅니다.

첫번째, 겁탁(劫濁)은 시대가 탁한 것을 말합니다. 환난이 그칠 사이가 없어 한 시각이라도

편안하고 즐겁게 지낼 때가 없는 사회악을 말합니다.

두번째, 견탁(見濁)은 삿되고 악한 사상과 견해를 가진 자들이 세력을 얻어서 돌아다니고,

올바르고 착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그 틈에서 밀려나가는 세상을 말합니다.

세번째, 번뇌탁(煩惱濁)은 자기 것은 아끼고 남의 물건은 탐내며, 자질과 실력은 돌보지 않고

권세와 영예 등을 욕심 내어 갖은 술수를 부리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면 상대방을 원망하고,

다른 이들을 중상모략 하기를 일삼는 무리들이 우글거리는 세상을 말합니다.

네번째, 중생탁(衆生濁)은 사람들의 자질이 극도로 저하돼서 견탁의 세상을 좋아하고,

번뇌탁의 세상에 사로잡혀 인간의 올바른 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득세를 하는 세상을

말합니다.  

다섯번째, 명탁(命濁)은 말세가 다가와 인간의 탐욕이 낳은 악업이 늘어남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점차 짧아져 백년을 채우지 못하는 것을 말합니다.   

 

구약에 창세기에 기록돼 있는 인물들의 평균 수명은 천년입니다.

아담은 130살 때 셋째 아들 셋(Seth)을 낳고 800년을 더 살아 930살을 살았죠.

은 105살에 에노스(Enosh)를 낳았고 912살까지 살았습니다.

에노스는 90살에 게난(Cainan)을 낳았고 905살에 죽었습니다.

게난도 910살까지 장수를 누렸고, 그의 아들 마할랄렐(Mahalol-el)은 895살에 죽었습니다.

마할랄렐의 아들 야렛(Jared)은 962살까지 살았습니다.

야렛은 162살에 에녹(Henoch)을 낳았고, 에녹은 65살에 무두셀라를 낳은 뒤 계속 자녀를 낳았죠.

아담의 7대손인 에녹은 365년을 산 뒤, 심지어 승천했습니다.

순결한 신앙심을 인정받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과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에녹은 하나님과 동행하다가 사라졌다.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신 것이다. <창세기 5:24>

 

므두셀라는 족장들 중 가장 오래 산 인물로 969살까지 살았고, 180살 때 라멕(Lamech)을

낳았습니다.

라멕의 아들이 바로 노아의 방주로 유명한 '휴식'이라는 뜻의 노아(Noah)입니다. 

아담의 10대손인 노아는 950살까지 살았습니다. 

... 이들은 학자들이 말하는 이른바 '전설적 수준'의 수명을 누리는 복을 받은 노아의 대홍수

이전의 10명의 족장들입니다.

작금의 정치판은 물론이고, 인간의 달라진 수명만 보아도 왜 오탁악세인지 이해가 갈 겁니다.

 

눈은 그쳤고,

잿빛 하늘에 조금씩 어둠이 깃들기 시작합니다.

바람은 다시 잠잠해졌습니다.  

음악은 Shadows of Light와 메인 음악인 Lotus Moon을 거쳐 United Reprise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런 날은 잔득잔득한 재즈도 아주 잘 어울립니다.

간만에 아름다운 설경을 구경하며, 잠시 마음을 정화시킨 시간이었습니다.

 

 

   *  이 글은 저작권의 보호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