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궁궐에서 가장 바쁜 곳이 있었다.
잔치를 위해 임시로 세워진 숙설청의 숙설소(熟設所)였다.
사옹원 총책임자인 종3품 제거의 지휘 아래 주방장 종6품 재부,
부주방장 종7품 선부, 조리사 종8품, 화열 담당 정9품, 음식 삶는 일
담당인 종9품 팽부가 총동원돼 요리를 만들었다.
<이몽 1부, 290p>
왕실 음식은 모두 사옹원 소속 남자 요리사들이 전담했다.
임금 수라 때에도 진지사리를 담당하는 내시들이 기미와 시중을 들었다.
대신 내명부는 여관들이 담당했다. 남녀유별 때문이었다.
<이몽 1부, 291p>
TV 드라마와 소설, 뮤지컬 등 우리나라 문화예술 전반계에서 가장 역사왜곡이 만연한 부분이
바로 이 대목이다. 모든 드라마와 소설이 왕실의 음식을 궁녀들이 만드는 것으로 나온다.
그 전의 역사드라마가 모두 같은 오류를 범했지만, 이에 방점을 찍은 것은 단연 <대장금>이다.
그러나 우리나라 왕실에서 궁녀들이 음식을 만든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시스템 자체가 그렇게 되어있지를 않다.
기록을 확인하지 않고 들은 풍월이나 맘 내키는 대로 쓰다보니 이 희한한 역사 왜곡은
오랜 세월동안 마치 진실처럼 포장돼 보편화 됐다.
진실을 알고 있는 일부 학자들 또한 한류에 지대한 공헌을 한 <대장금>의 눈치를 보며,
아예 체념을 한 듯 입을 다물고 있다.
사실 이 부분에 대해 알고 있는 학자들 자체가 극소수이다.
역사학자라고 해서 역사에 대해 모든 것을 아는 게 아니다.
전공이 시대별로 각각 나뉘어 있어, 자신이 연구한 부분에 있어서만 전문적인 지식을 가지고 있다.
결국, '조선시대에 왕의 수라는 누가 만들었는가?' 하는 진실을 파헤치는 작업은 작가인
저자가 이몽(異夢)에서 밝히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후에도 이를 논의하는 학자는 한명도 없다.
분명히 밝히지만, 역사왜곡은 작가들만의 책임이 아니다.
왜곡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침묵하고 방기(放棄)하는 일부 학자들의 책임 또한 크다.
<경국대전(經國大典>은 조선 왕조의 근본을 이루는 법전이다.
성종 16년(1485년) 정월 초하루에 전국적으로 공포된 경국대전은, 후에 <대전속록(大典續錄>과
<대전후속록(大典後續錄)> 등의 후속 법전으로 내용을 추가하거나 보완을 했지만, 기본 골격은
그대로 유지한 채 갑오경장이 일어난 1894년 이전까지 조선왕조를 통치하는 기본 법령으로
준수돼 왔다. 때문에 누가 왕실의 음식을 만들었는가를 알려면 <경국대전>에 나타난 사옹원과
내시부, 내명부의 직제를 살펴보면 조선왕조 일상식의 조리와 음식배선에 대해 명확히 알 수가
있다.
사옹원(司饔院)
선주원(膳廚院)으로도 불리던 사옹원은 조선시대에 궁중의 음식을 맡아 운영하던 기관이다.
임금의 수라와 대궐 안의 식사를 공급하는 업무 때문에 책임자인 제조(提調)는 왕족들이나
왕의 신임을 받는 최측근 인사들이 주로 맡았다.
세종의 손자인 운산군도 오랫동안 사옹원 제조를 맡았고, 영조도 연잉군 시절 사옹원의 제조를
맡아 궁중 음식을 총괄했다.
얼마전 다루었던 정조의 총애를 받은 간서치 이덕무도 사옹원에 근무했고, 유자광도 사옹원
제조로 두 번이나 근무했다.
또 현종의 장인인 김우명과 고종의 아들인 의친왕도 사옹원 제조로 근무했다.
모두 실록에 나타난 사실들이다.
이는 사옹원이 얼마나 중요한 관청이었는가를 증명하는 대목이다.
제조의 감독을 받는 사옹원의 실무 총책임자는 제거(提擧)로 정3품 당상관과 종3품 등 두 명이다.
그 밑으로 종6품인 재부(宰夫)가 대전 수라간과 왕비전 수라간을 담당하는 주방장을 맡았다.
종7품인 선부(膳夫)는 식사 담당관의 우두머리로 태조와 신의왕후의 사당인 문소전 수라간과
대전 다인청을 담당했다. 다인청(多人廳)은 장번내시들의 숙소이다.
정9품인 두 명의 임부(飪夫)는 화열(火熱)을 다루는 식관으로 한 명은 대전 수라간과 왕비전
다인청, 세자궁 및 세자빈궁 수라간을 담당했고, 한명은 대전 은기성상(銀器城上:왕실이 사용하는 은그릇 관리 담당자)으로 왕비전 수라간, 문소전 수라간, 세자궁 다인청을 담당했다.
종9품인 팽부(烹夫)는 음식물을 삶는 일을 담당하는 식관으로 모두 7명을 정원으로 두었다.
두 명은 대전의 은기성상, 왕비전 수라간, 문소전 수라간, 세자궁 다인청을 담당했고,
네 명은 대전 다인청, 왕비전 은기성상, 세자궁 및 세자빈궁 수라간을 담당했다.
나머지 한 명은 왕비전 다인청, 세자궁 및 세자빈궁의 은기성상이었다.
... 이들은 모두 남성들로 사옹원의 관원들이다.
이들은 잡역에 동원되는 노비들로 구성된 약 400여 명의 자비(差備)들을 이끌며 각 전각에 파견돼
왕실의 음식을 만들었다.
* 반감(飯監) : 반찬 및 그 밖의 음식물을 맡아보는 노자(奴子) (16명)
* 별사옹(別司饔) : 고기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노자 (28명)
* 탕수색(湯水色) : 물 끓이는 일을 하는 노자 (26명)
* 상배색(床排色) : 상 차리는 일을 전문적으로 맡아보는 노자(22명)
진상상배색(進上床排色)과 다인상배색(多人床排色) 등... 대전, 중궁전,세자궁,
세자빈궁의 상 차리는 일과, 각 궁에 파견나가 있는 내시들을 위한 상 차리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던 노자들.
* 적색(炙色) : 생선 굽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는 노자(18명)
* 반공(飯工) : 밥 짓는 일만 하는 노자(30명)
* 포장(泡匠) : 두부 만드는 일만 하는 노자(10명)
* 주색(酒色) : 술 빚는 일만 하는 노자 (12명)
* 다색(茶色) : 차 끓이는 일만 하는 노자(10명)
* 병공(餠工) : 떡 만드는 일만 전문으로 하는 노자(10명)
* 증색(蒸色) : 음식물 찌는 일만 맡아하는 노자(22명)
* 등촉색(燈燭色) : 등촉 밝히는 일만 하는 노자(10명)
* 성상(城上) : 기물을 맡아 간수하는 노자(56명)
* 수복(守僕) : 단묘(壇廟), 능침(陵寢) 등의 소제를 담당하는 노자. (4명)
* 수공(水工) : 물 긷는 일을 하는 노자(30명)
* 별감(別監) : 잡무에 종사하는 노자. 일명 내시별감으로 불렸음.(86명)
.... 이들은 거의 400여 명에 이른다.
좌우 양번으로 2교대를 했기 때문에 한번에 약 200여 명씩 근무했다.
자비들은 "각기 소장하는 일을 맡아하는 자"라는 뜻의 각색장(各色掌) 으로 불렸는데,
반감에서부터 별감에 이르기까지 철저히 분업화되어 각자의 맡은 바 소임만 담당했다.
이들 또한 모두 남자들이다.
기록을 살펴보면 사옹원에서 일을 도운 비녀(婢女)는 극소수에 불과하다.
조리부터 잡일에 이르기까지 궁중의 음식은 모두 남성들이 담당했다.
한데 드라마와 영화, 소설, 뮤지컬 등에서는 어김없이 상궁들이 왕의 음식을 만드는 장면이
나온다.
궁녀들의 하는 일 대부분이 음식 만들기이다.
이는 심각한 역사왜곡이다.
기록을 확인하지 않는 것은 물론, 기본적인 자료 조사조차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에 거리낌없이
역사를 왜곡해 진실처럼 만들고 있다.
또 많은 사극 드라마가 외국으로 수출돼, "특이하게 조선 왕실만 궁녀들이 음식을 만들었다."는
허무맹랑한 얘기가 들려오게 만든다.
왕실의 음식은 독살 등 여러가지 위험이 있기 때문에 유럽은 물론, 중국과 일본도 음식 만드는
일을 철저히 관리해 여자들의 접근을 막았다.
이는 궁중의 복잡한 음식을 만드는 일이 여성들의 신체적 특성상 고된 노역이라, 처음부터 궁중
요리에서 궁녀들을 제외시킨 것과도 연관이 있다.
조선 왕실에서는 퇴선간으로 음식을 물리는 것은 궁녀가 담당했지만, 일본에서는 이것마저도
남자들이 담당할 정도로 철저히 통제했다.
왕의 수라나 탕제를 먼저 먹어보고 독이 들어있는지 확인하는기미(氣味)나, 진지를 올리는
진지사리(進止篩里)의 임무도 모두 내시들이 했다.
'사리'란 본래 몽고어로 "도운다(助)"는 뜻이다.
또 상(尙)이란 '주존(主尊)의 뜻으로 임금의 물건을 주관한다'는 의미가 내포돼 있다.
그러므로 내시부 소속 정4품 '상전(尙傳)'에서부터 정6품에 이르는 '상세(尙洗)'직에 이르는
내시들 중에는 사리(篩里)라는 이름으로 임금의 시중드는 일만 전적으로 맡아하는 계급이
존재했다.
한데 이를 모르는 작가들이 수십 년동안 TV와 소설 등에서 궁녀들이 왕의 안전에서 기미를
보거나 수라 시중을 드는 장면을 만들어 왜곡된 궁중문화가 계속 잘못 전해지고 있다.
조선시대는 성리학이 지배하던 시대이다.
남녀유별이 엄격히 적용됐다.
때문에 내명부의 왕비전이나 세자빈궁의 식사 때에는 당연히 여관들이 기미나 시중을 들었다.
내명부의 잔치인 내연(內宴)에서도 의장(儀仗) 드는 일은 하님여령(女伶)이 했고, 고사여령이
정재를 공연했다.
또 내연의 음악 연주 또한 맹인악사나 여악사들이 담당했다.
그렇다면 이런 역사왜곡은 왜 일어났을까?...
궁중문화와 궁중요리에 관해 연구를 하던 학자들이 조선의 마지막 궁녀들의 구술을 바탕으로
자료들을 집대성 했는데, 이 궁녀들이 바로 내명부 전각에 소속돼 있던 나인이었다.
궁중 요리에 관한 부분은 10대 초반인 궁녀가 제대로 알리가 없는 시스템이다.
상궁은 30세 쯤 이르러서야 오를 수 있는 직위이다.
열두어 살 정도이면 겨우 아기 나인을 벗어난 궁녀인데, 궁중 요리에 관한 사옹원 시스템에
대해 무엇을 알겠는가?
더구나 일제시대에는 조성 왕실의 고유한 풍속이 많이 변화됐을 때이다.
1910년 한일합방으로 조선의 국권을 강탈한 일제는 500년 역사를 면면히 이어온 대한제국 황실을
이왕가(李王家)라는 왕공족의 일개 가문으로 격하시킨 뒤, 조선 고유한 왕실 문화 전반을 축소
시켰다.
한데, 이 당시 한 나이 어린 나인의 과장된 구술을 토대로 한 자료가 널리 퍼지면서, 앞에서 언급한
역사 왜곡의 오류가 시작됐다.
고래로부터 전해 내려오던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음식 문화의 전례가 왜곡되고 변질된 이유이다.
서양과의 외교관계가 성립되기 이전, 그리고 일제에게 국권을 침탈당하기 전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궁중 문화를 제대로 살펴보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경국대전을 확인했어야만 했다.
어떤 분야이건, 어떤 목적이건, 역사를 논할 때는 반드시 사료(史料)부터 먼저 확인해야 한다.
이것이 가장 기본적인 절차이다.
이 절차를 건너뛸 때, 역사왜곡의 전주가 시작된다.
역사왜곡은 법전이나 기록에 나타난 사실을 확인하는 절차를 밟지 않은 작가가 애당초 잘못이다.
허나 역사 왜곡을 알면서도 눈치를 보며 침묵하거나 방기한 학자들 책임 또한 크다.
또한 전문가를 자처하며 역사 기록도 확인하지 않고 단천한 소견으로 자문을 맡은 사람들에게도
그 책임이 있다.
문화예술계에 만연한 역사왜곡의 책임은 이 세사람들 공동의 책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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