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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섬

아라홍련 2012. 11. 26. 05:55

내가 자주 눈길 가는 곳에 써붙여 놓고, 늘 마음의 경계로 삼는 문구가 있다.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 삼아 머물고,

                    다른 이를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마십시오.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 삼아 머물고,

                    다른 것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마십시오.

 

          고려대장경 대반열반경에 있는 글이다. 봉이는 혼자 남겨진 왕이 충격에

          흔들릴까 저어하여, 왕이 스스로를 섬으로 삼고 귀의처 삼기를 당부했다.  

          편지를 읽고 애통해하던 왕이 다시 혼절했다. 혜각사에 한바탕 소란이 일었다.              

          그때 도승지와 상선이 의관들을 이끌고 들이닥쳤다. 마음을 놓지 못해 행궁에서

          안절부절하다가 뒤따라오는 길이었다. 사알 등에 업혀 나오는 왕을 본 도승지와

          상선이 동시에 전하를 부르며 달음박질쳤다.

          사색이 된 어의들도 말에서 뛰어내려 두달음질쳤다.

          한밤중에 혜각사가 발칵 뒤집혔다.   

 

                                                                                     <이몽 2부, 131p>

 

봉이가 죽은 뒤에 강화도를 찾은 왕이, 봉이가 남긴 편지를 보고 애통해 하다가 혼절하는 대목이다. 

나는 봉이가 왕에게 남기는 마지막 편지에 맞는 내용을 찾기 위해 금강경과 불서들을 뒤졌다.

우연히 고려대장경에서 이 글을 발견하고는 너무 맘에 들어 촌각도 지체하지 않고 곧바로 결정했다.

불심 깊던 평소의 봉이 성격과 너무도 잘 맞았기 때문이다.

봉이는 심약한 왕이 자신의 죽음에 충격받을까 저어하여, 대반열경에 나오는 가르침을 경계로 삼아

부디 슬픔과 충격에 흔들리지 않고 성군이 될 것을 염원하며 마지막 편지를 남겼다. 

나는 이 글을 수시로 읽으며 지금도 마음의 경계로 삼고 있다.

마음의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는 이 시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화두라고 생각한다.

인생은 단독자이다! 그 누구도 대신 살아줄 수가 없다.

삶이 비장한 이유이다.  

오로지 내 마음의 주인은 나 자신이어야만 한다. 의지처도 결국 내 자신이어야 흔들리지 않고

한결같이 본래 마음의 바탕자리를 잃지 않은 채 여여하게 살아갈 수가 있다.  

만약 자신의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하고 외적 여건에 의지하려 하거나, 자주 흔들리고,

허공으로 마음이 떠돌아 다니면 수양도, 수행도, 정복(淨福)도 물 건너가게 된다.

이들은 눈빛부터가 다르다. 상당히 불안하고 많이 흔들린다.

몸에 흐르는 에너지의 파동 자체가 매우 불안하다.

이런 사람들은 심리가 불안하고 변덕스러우며, 주위사람들을 자주 원망하고,

다른 이들을 괴롭히거나 상처를 주면서도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못한다. 

 

 

대반열반경은 3개월에 걸친 붓다의 마지막 행적을 소상하게 전하는 책이다.

붓다는 자신을 따르는 비구들에게 마지막으로 가르침을 남겼다.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법을 섬으로 삼고, 법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고, 남을 귀의처로 삼아 머물지 말라."

제자들이 각자 자율적인 의지와 인격으로 수행해 나가기를 바란 것이다. 

'나' 혹은 '나의 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존재만이 무아(無我)의 진리를 드러낼 수 있다.  

한데, 인디언 격언 중에도 이와 똑같은 가르침이 전해내려 온다.  

 

                  그대 자신의 영혼을 탐구하라!

                  다른 누구에게도 의지하지말고, 오직 그대 혼자의 힘으로 하라!

                  그대의 여정(旅程)에 다른 이들이 끼어들지 못하게 하라!

                  이 길은 그대만의 길이요.

                  그대 혼자 가야할 길임을 명심하라!

                  비록 다른 이들과 함께 걸을 수는 있으나, 다른 어느 누구도

                  그대가 선택한 길을 대신 가줄 수 없음을 알라!   

 

고려대장경 대반열반경과 인디언 속담의 내용이 똑같은 진리를 설파하고 있다.

허나 왕은 봉이의 바램처럼 스스로의 마음의 주인이 되지 못했다.

슬픔이 왕을 집어삼켜 버리고 말았다.   

강화도를 떠나 지존의 자리에 올랐지만, 고독하고 곤고한 삶은 늘 정인을 향한 그리움으로

삶의 희망을 찾았고, 그리움이 비상구가 되었다.

그러나 봉이가 이승에서 사라진 것을 알게 된 왕은 슬픔과 충격을 감내하지 못하고 서서히

삶의 의지를 포기했다. 대신 술과 여색을 자신의 섬으로 삼았다.

온유향(溫柔鄕)과 백운향(白雲鄕)을 의지처로 삼았다.

결국 왕의 육신과 영혼은 급속도로 파괴됐다. 

스스로를 섬으로 삼지 못하고 다른 대상을 섬으로 삼거나, 자신을 의지처로 삼지 못하고 

다른 대상을 의지처로 찾을 때의 삶이 과연 어떠하겠는가? 

 

    "전하께서는 여색을 즐기시는 게 아닙니다. 결코 정력절륜이 아니십니다. 

     벌성지부(伐性之斧,여색을 지나치게 좋아함은 목숨을 끊는 도끼와 같음)를

     누구보다 잘 알고 계십니다."

어의가 말을 잇지 못하고 눈물을 흘렸다. 낙담상혼한 노상선이 참담한 표정으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피하시는 겁니다. 참혹한 현실을 감내할 수 없어 자꾸만 다른 세상으로

     숨으시는 겁니다."

다른 어의가 말곁을 거들었다.

    "입에 담기 송구하오나, 전하께서는 살고자 하는 의욕이 전혀 없으십니다.

     주시행육(走尸行肉,살아 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정신이 빠져 있음)입니다."

 

                                                                              <이몽 2부, 290p>

 

결국 왕의 강파른 몸과 영혼이 바다에 떨어진 작은 꽃잎처럼 거친 파도에 섭슬리며

어지럽게 부유했다.

                                                                              <이몽 2부, 292~293p>  

 

간신히 한 손으로 움켜잡고 있던 삶의 끈이 어수(御手)에서 서서히 풀리기 시작했다.

사바세계와 저승을 번갈아 부유하던 왕의 영혼이 저승을 향해 한 발자국, 걸음을 내딛었다. 

 

                                                                               <이몽 2부, 314p>

 

인간은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실천하며, 영적 발전을 도모한다.

이 별에서의 삶을 학교라고 칭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아직도 많은 것을 배우고 익혀야 하는 삶이지만, 내게 가장 어려운 과제는 대열반경에

나오는 구절이다.

오늘도 나는 내 자신을 섬으로 삼고, 자신을 귀의처로 삼으며, 다른 대상을 섬으로 삼거나

귀의처로 삼지 않기 위해 다짐, 또 다짐을 하고 있다. 

 

 

   *  위의 글은 저작권의 보호를 받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