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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구자 비필고(伏久者 飛必高)

아라홍련 2012. 11. 19. 18:44

복구자 비필고(伏久者 飛必高)

"오래 엎드려 있으면, 반드시 높이 난다.".....

 

철학적 아포리즘인 동시에 문학적 고전인 채근담(菜根譚)에 나오는 구절이다.

내 인생의 좌우명이기도 하다.

나는 이 얘기를 아주 오래 전, 사부로부터 전해 듣고 큰 위로와 감명을 받았다.

20대부터 책을 너댓권 씩 내는 작가들과 달리, 난 오랫동안 문학적 수련기간을 거쳤다.  

언제부터 뜻을 펼치느냐, 하는 '시기의 결정'은 본인이 선택하는 게 아니다.

신의 영역이다.   

늦게 피는 꽃은 오랜 기간, 각고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의미이다.

영상작가 활동을 먼저 시작한 나는, 고정 프로그램을 맡고 있으면서도 내 재능에 대해

항상 의문을 가졌다. 내가 글을 잘쓰는 작가인지 도무지 확신이 서지를 않았다.

이런 상황은 작가에게 가장 힘들고 뼈아픈 시기이다.  

자신감 부족은 스스로를 자주 심연에 빠트려 늘상 회의와 갈등으로 허우적거리게 만들곤 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나는 다른 작가들은 상상할 수도 없는 치열한 공부와 오랜 글쓰기

훈련과정을 거쳐야만 했다. 

곤고한 생활은 삶의 무게로 무겁게 내 잔등을 짓눌렀다.

감당하기엔 너무 버거운 무게였다.  

세상 풍파에 시달릴 때 접한 채근담의 伏久者 飛必高(오래 엎드려 있으면, 반드시 높이 난다) 라는

구절은 생명수처럼 내 목을 축여주며, 인내의 시간을 자여할 수 있게 내 등을 다독거려 주었다.   

 

 

 

 

당연히 병원을 들락거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약으로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심한 정신적 압박에 시달려 나타난 정신신체적 증상(psychosomatic symptoms)임을 간파한

주치의는, 언제부터인가 나를 앞에 앉혀놓고 옛 성현들의 좋은 글로 정신교육을 시키기 시작했다.

때론 설득하고, 때론 서운할 정도로 매섭게 질타했다.

이때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청형한 성현들의 가르침과 금과옥조(金科玉條)를 접하게 됐다. 

경서와 고전에 관심이 생겨 책과 스승을 찾아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하게 된 것도 이때부터이다.  

 

그리고 다른 작가들은 수 십권의 책을 냈을 나이에, 나는 뒤늦게 문학의 길로 들어섰다.

책이 출간되자 사부인 주치의는 진료실 책상 뒤 서가에 이몽(異夢)을 수 십권 사서 꽂아놓고

싸인을 요청했다. 내 첫번 째 싸인회였다.

그는 이몽을 친척과 동료 의사들에게 모두 나누어주었다.

지난번 병원에 갔더니 그 많던 책이 한권도 없었다.  

그는 이몽을 여러 번 읽고, 단어 하나하나를 확인하며 두툼한 단어장을 만든 열성 독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

사부는 내게 고전과 인생의 지혜를 가르쳤고, 나는 그에게 문학과 역사를 알려준 셈이다. 

결국 내 주치의는 작가와 편집자를 제치고(?) 2쇄의 교정까지 맡았고, 지금 다시 새로운 교정을

맡아 글자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를 샅샅이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좋은 작가를 만들려면, 주위에 좋은 사람들이 필요한 법이다. 

내겐 새로운 꿈이 하나 생겼다.

사부의 서가 한 줄 전체에 내가 쓴 책들이 꽂혀있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이 가장 현명하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다른 이들보다 훨씬 뒤늦게 문학의 길로 들어선 지금... 예전과 무엇이 달라졌을까?

나는 작품을 쓰고자 하는 시대의 시간과 공간, 언어를 완전히 장악하고 글을 쓴다. 

 

요즘은 모든게 조급하다.

30대 초반의 배우들이 수상식에서 20대에 상을 타지 못해 초조했었다고  눈물을 흘리고,

작가들은 30대만 되도 상타는게 늦는다고 조급해 한다.

20대 초반에 최고의 정점에 올랐던 스포츠 스타들은, 이젠 삶의 목표가 사라졌다고 울먹인다. 

이런 장면이나 기사를 볼 때마다 씁쓸함을 금치 못한다. 

개선자 사독조(開先者 謝獨早)... 일찍 핀 꽃은 빨리 시드는 법이다.

늦게 핀 꽃이 더 아름답고, 더 오래 간다. 

인간인 이상, 아무도 거스르지 못하는 자연의 법칙이자 천리(天理)이다.

"오래 엎드려 있으면 반드시 높이 난다."는 고금의 진리를 잊지 않고 치열한 삶을 잘만

견디어낸다면, 인생을 좀 더 안한(安閑)하게 보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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