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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서치(看書癡), 이덕무의 詩

아라홍련 2012. 11. 18. 23:48

1779년(정조3년) 기해년, 정조는 문풍이 점차 쇠퇴하고 인재가 묻혀버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 

서얼들 중, 문재(文才)와 학식이 뛰어난 4명을 규장각 실무자인 검서관으로 발탁했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 등이다.  이들의 문조(文藻)를 사랑한 왕은 검서관들에게 규장각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을 보고 규장각 팔경(奎章閣 八景)이라는 근체시(近體詩) 8편을 짓게 했다. 

감격한 이들은 어명에 따라 시를 지어 바쳤다.

이덕무의 <규장각 팔경>은 칠언율시로 되어 있는데, 봉모당의 은하수, 서향각의 연꽃과 달, 

규장각에서의 선비 시험, 불운정(拂雲亭)에서의 활쏘기, 개유와의 매화와 눈, 농훈각의 단풍과

국화, 희우정의 봄빛, 관풍각의 추사(秋事)라는 제목이 붙은 여덟 수의 시로 되어 있다.

그중  불운정에서의 활쏘기라는 시는 다음과 같다. 

 

                                         ~* 불운정에서의 활쏘기 *~  

 

                               질서있게 무리지어 오르내릴 때

           북소리 울려 퍼지고 비단 깃발 나부끼네.

           푸른 전나무에 구름 개니 표적의 빛깔 뚜렷하고

           금잔디 깨끗하니 과녁도 번뜩이네.

           총명은 이미 순 임금 신하에 경계한 것 살폈고,

           다투면서 생각할 건 공자가 말씀하신 위의일세.

           좋은 시대 문덕을 닦아 과녁 뚫는 것 숭상치 않으니

           마음이 평탄하고 몸 곧음이 활 잡는 바른 자세일세.

 

                    정조는 각신(閣臣)을 불러 검서관들의 시 중에서 이덕무의 시에 주사(朱砂)로

비점(批點)을 찍어 간서치 이덕무를 장원으로 뽑았다. 

상품으로는 <명의록(明義錄)> 한 질을 하사했다.

명의록은 정조 즉위년인 1776년, 세손(정조)의 대리청정을 저지했던 홍인한과

정의겸의 죄를 물은 사실을 김치인 등이 어명을 받아 편찬한 책이다.

이튿날 정조는 다시 '영주에 오르다'라는 제목으로 20운(韻)의 시를 검서관들에게

짓게 했다. 이덕무가 다시 장원을 차지했다.

검서관 들 모두 정조의 총애를 받았지만, 간서치 이덕무는 특별한 사랑을 받았다.

 

이덕무는 동료들과 몽답정을 즐겨 찾았다.

대보단 남문인 공북문(拱北門) 바깥에 있어 당시 후원의 영역에 포함되지 않아

출입이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몽답정은 흐르는 시냇물을 아래로 하고 그 위에 

정자를 세워, 창덕궁 후원에 있는 정자 중 가장 규모가 크다. 

이몽(異夢)에도 몽답정이 나온다.

 

       먹구름이 비껴간 달이 다시 환한 빛을 수굿이 우리자 나무 위에서 기다리던

       자객들이 달려오는 군사들을 향해 일제히 표창을 던졌다. 군관들이 비명을

       지르며 동시에 말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말 울음 소리와 군관들의 신음 소리로

       어둠에 잠들어 있던 금원(禁苑)이 아비규환이 됐다. 몽답정 방향으로 내달리던

       자객들이 대보단 남문인 공북문 담장을 훌쩍 넘어 순식간에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용호영 군사들이 급히 공북문을 열고 박차를 질렀다.

 

                                                                             <이몽 1부, 209p>

  

 

 

 

 

 

이덕무가 몽답정에서 남긴 시 <몽답정에서 함께 지음>을 읽으면, 화조풍월을 즐겼던 그의

모습이 절로 상상이 돼 금세 즐거워진다.

 

무자년 6월 그믐에 내가 윤경지, 유운옥, 박재선과 함께 몽답정에서 쉬면서 참외 13개를 

깎았다. 재선의 소매를 뒤져 흰 종이를 얻고 부엌에서 그을음을, 냇가에서 기왓장을 얻었다. 시를 다 지었으나 붓이 없기에 나는 솜대 줄기를 뽑아오고, 경지는 운부(韻府)의 낡은 종이로 노를 꼬고, 운옥은 돌배나무 가지를 깎고, 재선은 부들 순을 씹어서 연꽃은 향기가 나고,

매미는 울고, 폭포는 물을 튕기는 가운데서 썼다. 

동자가 옆에 있었으니 갑광(甲光)이와 정대(鼎大)였다. 

 

               연꽃 향기 묘하게 고요한 마음 입증하고,

               금붕어는 아가미를 벌렁이며 처마 그늘에 노닌다. 

               다복한 송림 물방울 듣는 소리...

               한 줄기 하늘빛이 시내 바닥 뚫었구나.

 

아름다운 풍치와 풍류가 마치 한 폭의 그림처럼 연상된다.

활자중독자, 간서치, 책만 읽는 바보 이덕무는 책만 읽은 게 아니다.

그의 절등한 詩想은 치열한 독서와 함께 유유자적 자연을 벗할 줄 아는 강산풍월과

용여(容與)함에서 나왔다. 

이덕무는 검서관과 사도시를 겸직하다가 사근도 찰방의 직무를 맡았다.

1783년에는 내직으로 들어와 광흥창 주부에 제수됐고, 다음해 사옹원주부로 옮겼다가

적성 현감에 제수됐다. 적성에 있는 동안 10번의 인사 고과에서 모두 다 최우수상을 받았다.

현감 재직 당시, 이덕무는 "청렴하면 위엄이 생기고, 공평하면 혜택이 두루 미친다."고 늘상

말했다. 지금 이 시대의 공직자들에게도 약석(藥石)이 되는 말이다. 

젊은 시절 쓴 산문에서는 "처신하는 것과 행동 조심하기를 어린아이나 처녀처럼 해야 한다." 고 소신을 밝히기도 했다.     

 

1793년, 이덕무가 53세로 졸하자 정조의 상심이 매우 컸다.

왕은 내탕전으로 유고를 간행하여 오래도록 세상에 전하게 했으니, 그 책이 바로 71권

25책으로 이루어진 이덕무의 전집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이다.

그리고 왕은 그의 검서관 직을 아들 광규가 물려받게 했다.

실로 신하들 중에 성상(聖上)의 은총을 입은 것이 지극하로 애련했다.

연암 박지원은 광규로 부터 이덕무의 행장을 부탁받고는 그의 곧고 깨끗한 행실, 해박한

지식, 온순하고 단아한 용모와 말씨를 다시 볼 수 없음을 한탄하며 애석해했다. 

연암은 행장 곳곳에서 이덕무의 책에 대한 애착을 언급했다.

 

    늘 책을 볼 때면 그 책을 다 읽은 다음에 꼭 베끼곤 했다. 그리고 항상 작은

    책을 소매 속에 넣고 다니면서 주막이나 배에서도 보았다. 그래서 집에는 비록

    책이 없었지만책을 쌓아둔 것과 다름없었다. 평생 동안 읽은 책이 2만 권

    넘었고, 손수 베낀 문자가 수백 권이 되는데 그 글씨가 반듯하고 아무리 바빠도

    속자(俗字)를 쓴 것은 한 글자도 없었다.     

 

왕성한 독서력과 명물도수지학(名物度數之學)에 두루 능통했던 그의 해박한 지식은

조선 후기 지성사를 한층 더 풍요롭게 만들었다.  

범재도사, 삼호도사로 불리웠던 이덕무는 관리로 일한 15년 동안 정조로부터 책과

옷감, 음식, 채소, 과일, 생선, 약 등... 총 139종의 물품을 무려 520여 번이나 하사

받았을 정도로 각별한 총애를 받았다. 

한마디로, 의미있는 인생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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