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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몽(異夢) 표지 그림의 비하인드 스토리

아라홍련 2012. 11. 18. 17:05

 

 

이몽의 표지가 참 예쁘다는 소리를 숱하게 들었다.

나는 출판사로부터 이 표지 그림을 받고는 한번에 OK를 했다.

작품의 이미지와 절묘하게 맞는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편집자는 표지 그림을 보고 한번에 OK를 한 작가는 내가 처음이라고 했다.

어느 작가이든 맨 처음 나온 표지 그림은 마음에 들어하지 않아 여러 번 수정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한데 토씨 하나에도 신경을 곤두세우는 까다로운 내가, 한번에 마음들어 했다.

오히려 나는 출판사에다 북디자이너에게 어떤 수정도 요구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혹여, 예술성이 훼손될까 저어해서였다.  

 

이몽의 표지 그림은 조선서대의 화가 조희룡의 홍백매도팔폭병풍에 있는 그림 중 일부이다.

그림 중에서 가장 멋지고 예술적인 나뭇가지를 선택해 작품화 했다.

이 그림은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돼 있는 보물이다. 

은행나무 출판사는 자체에 우수한 디자인 팀을 운영하고 있음에도, 이몽에 정성을 다하기 위해

한국출판회의 올해의 출판인상 디자인 부문을 수상했던 민진기 씨에게 표지 그림을 맡겼다.  

민진기 디자인 연구소 대표이자 한국 최고의 북디자이너인 민 대표가 어렵게 국립중앙박물관의

허락을 받아 조희룡의 홍백매화도를 작품에 사용했다.

박물관에 있는 원 그림은 다음과 같다.     

 

 

 

 

 

 

 

 

 

그림을 사진 찍어서 그대로 사용하면 그건 작품이 아니다.

하지만, 국보이기 때문에 조금도 고치거나 다르게 표현할 수가 없다.

때문에 그림의 선 그대로 민 대표가 꽃모양 하나하나를 종이로 다 오려붙이는 등 각고의

노력을 기울여 작품을 완성했다.  

책 표지의 그림을 제대로 감상하려면, 띠지를 빼고 그림 전체를 보면 훨씬 더 아름답다.

이몽의 책 표지는 작가만 마음에 들어한 게 아니라, 출판사 대표님도 마음에 들어하셨다.

독자들도 표지 그림이 이쁘고, 작품의 이미지와 잘 맞는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몽은 책 표지에까지 곡진한 노력을 기울여 만든 책이다.

 

조희룡은 중인 출신의 조선 말기 문인 화가이다.

19세기 중인예원의 영수로 1789년에 태어나서 1866년에 졸했다.

Daum 백과사전에 나오는 생몰년도(1797-1859)는 틀린 것이다.

인터넷 사전엔 틀린 게 비일비재하다. 단지 사람들이 모를 뿐이다.

조희룡은 중인 출신의 화가이기 때문에 스승인 추사 김정희에 가려서 덜 조명됐을 뿐,

19세기에 온전히 예술(회화)의 독립과 자립을 위해 평생 그림만을 그리고, 또 글을 썼던

탁월한 예술가이다.

그의 그림 대부분은 매화도이다.

"평생 그림 속에서 매화를 보노라." 하고 노래하며 매화 그림만 그렸다.

사대부들이 심심풀이로 그린 그림이 아니라,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그림에 골몰하며

회화의 독립된 세계를 추구한 진정한 예술가이다.

 

         "문득  영상 대감이 생각나는구나."...

          갈맷빛 비단벌레 장죽을 빨던 신정왕후가 유배 중인 권돈인을 생각하며

          눈시울을 붉혔다.

         "조금만 결기를 꺾었어도 그런 역옥까진 겪지 않았을 것을, 쯧쯧쯧..."

          대왕대비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체머리를 흔들었다. 헌종 탈상 때 벌어진

          신해예론 당시, 권돈인은 혼자서 고집을 꺾지 않았다. 

          왕이 즉위한지 이미 2년이 지난 때였다. 아직도 왕의 정통성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였다. 성균관 유생들이 벌떼같이 일어나 영의정을 탄핵했다.

          대간에서 연차해 임금을 잊고 나라를 그르친 죄로 영상의 처벌을 요구했다.

          정국 안정을 위해 권돈인을 영의정으로 중용했던 순원왕후는 이를 진화하기

          위해 고군분투했다. 무려 일곱 번이나 대신들의 면담 요청과 상소를 무시했다.

          악착같이 상소를 올리는 관리들은 감사정배에 처했다.

          허나 원로대신들이 의견을 낸 여덟 번째 상소에서는 더 이상 버티지를 못했다.

          결국 낭천으로 유배를 떠난 권돈인은 아직도 유배생활 중이었다."

 

                                                                             <이몽 2부, 192~193p>

 

소설 인용 내용은 실록에 나오는 그대로이다.

순원왕후의 노련한 정치력과 대범함, 따뜻한 성품의 진면목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나는 실록을 샅샅이 읽고 또 읽으며, 순원왕후가 권돈인을 살리기 위해 얼마나 분투노력

했는지를 기록으로 확인한 뒤, 아릿한 마음으로 잠시 숙연해졌다.

1851년 음력 6월, 결국 권돈인은 낭천으로 유배를 떠났고 추사 김정희는 권돈인을 뒤에서

부추기고 조종한 죄로, 헌종 때 갔던 제주도 유배 이후 또다시 북청으로 유배를 떠났다. 

추사의 제자인 조희룡도 관련 인물로 지목되어 임자도로 유배를 갔다.

한데... 이몽(異夢) 표지 그림이 바로 우봉(又峰) 조희룡의 그림이다.

정말 기묘한 일이지 않은가?...

이몽에 조희룡에 대한 언급이 없으므로 북디자이너가 소설의 내용과 연관시켜 이 그림을

선택했을 리 만무하다.

우연히 선택한 그림이 바로 조희룡의 홍백매화도이다.

철종의 정통성을 부인해 유배를 간 조희룡의 그림이, 시대의 벽을 뚫고 철종을 150년 만에

재조명한 소설의 표지 그림으로 나타난 것이다.        

생각할수록 기막힌 우연이다.

아니, 우연이라고 하기엔 소름이 돋을 정도로 극묘하다.

이런 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정말 모르겠다.

 

한 문학 전문 스타블로거가 철종, 안동 김씨, 흥선군... 이 세사람을 오묘한 조합이라고

언급한 것을 본 적이 있다.

허나 철종, 작가, 조희룡... 이 세 사람의 관계야말로 진정 희한하고, 은밀하고, 오묘한

조합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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