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청은 꽉 채워져 있었다. 영의정을 가운데 두고 긴 탁자 양편으로 국구를 비롯해
조정을 장악한 안동 김씨 일족과 삼공육경, 당상관들이 모두 들어와 있었다.
먹이를 눈앞에 둔 독수리의 날카로움과 섬뜩함으로 빈청엔 살얼음이 번쩍거렸다.
예를 갖춘 상선이 영의정 맞은편 자리에 엉거주춤 앉자 사헌부 지평이 난감한 얼굴로
종이 한 장을 상선 앞에 내밀었다. 순간, 상선 얼굴이 흙빛으로 변했다.
종이에는 북한산 자락에 숨겨 놓은 정인의 이름과 상궁 당시의 소속, 직급이 정확하게
적혀 있었다. 상선을 주시하던 안동 김씨 일족 입가에 스르르 회심의 미소가 번졌다.
내시부에 간자를 꽂아놓고 오랫동안 미행시킨 성과였다.
새끼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던 김좌근이 여유로운 목소리를 냈다.
"궁녀는 지존이신 군왕의 여인이오. 설사 역병으로 출궁했다 해도
여승으로 출가하던지, 절개를 지키며 평생 독신으로 살아야 하는게
궁녀의 운명이고 조선의 국법이오."
유구무언인 상선이 죄인처럼 고개를 숙였다.
"한데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상선이 그것도 대전 시녀상궁으로
성총을 받았던 궁녀를 그동안 첩실로 데리고 살았다?... 세상에 이런
멸륜패상이 어디 또 있단 말이오."
........................................
" 노상선으로 물러나겠습니다."
안동 김씨들 입가로 해말간 미소가 번졌다.
"아암, 그래야지. 그래야 하고말고."
"현명한 선택이오. 그것만이 최선의 방책이오."
<이몽 2부, 167~168p>
안동 김씨들은 철종의 최측근으로 왕을 보호하는 충신인 내시부 수장 상선을 왕에게서
떼어놓기 위해, 간자를 통해 상선을 오랫동안 미행해 왔다.
이 부분은 상선의 정인 정상궁의 존재가 발각돼 곤경에 처하는 대목이다.
두사람의 인연은 어떻게 닿았을까?...
정상궁의 부모는 역병에 걸려 출궁당한 딸을 살리기 위해 백방으로 뛰어다녔다.
소식을 들은 상선이 즉시 정상궁을 찾아 나섰다.
열꽃이 번진 정상궁의 얼굴은 옛 얼굴을 가늠키 어려웠다.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목숨을 담보로 상선이 정상궁 간병에 뛰어들었다. 한의학과 약초학을 두루 섭렵한
상선은 은밀히 어의들의 자문을 받으며 치료에 심혈을 기울였다. 상선의 지극정성이
하늘의 감응을 일으켰는지 저승문 앞에 서 있던 정상궁이 천천히 뒤돌아섰다.
천우신조에 구사일생이었다.
정상궁 마음이 화선지에 물방울 스미듯 상선 마음속으로 조용히 옮겨가 앉았다.
상선은 숱한 밤을 지새우며 초민(焦悶)을 거듭했다.
죽음과의 사투에서 함께 손잡고 싸웠던 상선 마음도 이미 오래전 정상궁 마음속에
살포시 옮겨가 있었다. 상선이 결국 정상궁 마음을 받아들였다.
애오라지 마음뿐이었다.
출궁한 궁녀 신분인지라 혼인할 수도 없었다. 두 사람은 상선 집 뒤란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놓고 영혼의 동반자가 되었다. 벗이 되었다. 영혼끼리의 결합이었다.
<이몽 2부, 170~171p>
상선은 왜 버티지 않고 쉽게 노상선으로 물러나려 했을까?
경국대전에 명시된 방출궁녀 간통 금지율(放出宮女 奸通 禁止律) 때문이다.
구중궁궐에 궁녀로 있다가 궁궐 밖으로 내보내어진 궁녀들은 그 누구와도 혼인하거나
잠자리를 함께 해서는 안 되었다. 평생 수절하며 보내야만 했다.
궁녀가 방출되는 경우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중병이 생겼거나 가뭄이 들었을 때이다.
중병에 걸렸을 때 궁녀를 궐 밖으로 내보내는 이유는 왕과 왕비, 왕세자와 세자빈, 그리고
왕세손 이외에는 그 누구도 궁궐 안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아무리 왕의 총애를 받고 있는 후궁이라 할지라도 죽음이 임박해서는 궐 밖으로 내보내져
임종을 맞았다. 하물며 궁녀는 말해서 무엇하랴.
실록에는 가뭄 때마다 궁녀들을 방출시킨 기록이 남아있다.
평생을 수절하며 궁궐에 갇혀사는 궁녀들의 분한을 풀어줘 하늘의 노여움을 풀기 위해서였다.
전통시대에는 자연적인 재해가 음양의 도가 어그러졌을 때 일어난다고 보았다.
그래서 천재(天災)가 일어날 경우, 궁녀들을 수 명 또는 수십명씩 궁궐 밖으로 내보내 살게 했다.
대신, 궁녀는 왕의 여자였기 때문에 다른 사내들은 감히 범접 못하게 평생 수절하도록 했다.
경국대전에는, '관리로서 방출궁녀 및 무수리를 데리고 사는 자는 장 백대에 처한다."고
명시돼 있다. 궁녀도 똑같이 처벌했다.
현직 상궁이 간통하다 발각돼면 어떻게 처벌했을까?
국사범으로 분류해 곧바로 부대시형(不待時刑)에 처했다.
조선시대에는 봄과 여름에는 형을 집행하지 않고, 추분까지 기다리는게 원칙이었다.
그러나 십악대죄(十惡大罪) 등 중죄를 범한 죄인은 때를 가리지 않고 처형했다.
궁녀의 간통은 부대시형으로 처벌할 정도로 중범죄였다.
임신했을 경우에는 출산 직후 처형하고, 아이는 즉시 노비로 만들었다.
간통한 상대방도 함께 처형했다.
그래도 관리들과 궁녀와의 스캔들은 심심치 않게 일어났다.
현종 때의 궁녀 귀열은 서리이자 자신의 형부인 이홍윤과 간통하여 임신했다.
형조에서는 교수형을 언도했지만, 격분한 현종은 참수형에 처하라고 명했다.
너무 과중한 벌이라고 형조에서 적극 간언했지만 현종은 끝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귀열은 참수형을 당하고, 간통 상대자인 이홍윤은 신속히 도주했다.
세종 때 부마였던 권공(權恭)은 옹주의 수발을 들던 궁녀 고미와 간통을 하고
수강궁 담을 넘어 도망치다가 붙잡히기도 했다.
조선 말기와 대한제국 때는 풍기가 문란해져 궁녀와 관리들의 간통이 적잖이 일어났다.
그러나 왕이 궁녀를 스스로 다른 이에게 준 특별한 경우도 있다.
왕자의 난으로 정권을 잡은 태종은 아버지 태조의 마음을 위무하기 위해 미색의 궁녀를
보냈고, 고종은 철종의 옹주인 영혜옹주와 결혼한 박영효가 3개월 만에 사별하자 상궁
범씨를 비롯해 궁녀 몇 명을 하사했다. 박영효는 이들에게서 서자와 서녀를 두었다.
국법상 부마는 재혼이 불가능하고, 축첩 또한 불법이기 때문에 절가(絶家)할 것을 우려해
특혜를 준 것으로 보인다. 박영효의 서손녀 박찬주는 훗날 의친왕의 아들 이우와 결혼했다.
어느 시대이건 예외는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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