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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의 기녀(妓女)

아라홍련 2012. 11. 7. 21:10

 

                     

                                       <프랑스 엽서에 실린 기녀 사진>

 

                    <혜원 신윤복의 청금상련(聽琴賞蓮), 장죽을 든 기녀는 의녀(醫女)이다.>

 

 

한쪽 무릎을 곧추세워 비단 치맛자락을 가슴팍에 휘감은 아지가 지그시 눈을 감고 옥구슬 같은

목소리로 시를 읊었다.

 

                            꿈에 뵈는 님이 인연 없다 하건마는 

                            담담히 그리울 제 꿈 아니면 어이하리.

                            꿈이야 꿈이언마는 자로자로 뵈어라.

                            죽어서 잊어야 하랴. 

                            살아서 잊어야 하라.

                            죽어 잊기도 어렵고, 살아 그리기도 어려워라.

                            저 님아!

                            한 말씀만 하소라.

                            사생결단하리라. 

 

박장대소를 하던 왕이 순간, 머리를 흔들었다.

몽환적인 눈빛과 뇌쇄적인 자태가 외숙의 애첩인 나합과 흡사했다.

속내를 알 수 없는 복잡미묘한 표정과 당당한 말투, 콧대 센 것까지 흡사했다.

  "자네는 기녀도 아니면서 어찌 그리 기방의 풍류가 짙은가?"

아지가 새침한 표정으로 눈을 흘겼다.

  "신첩 대모가 조선 제일의 명기 초선 아닙니까?"

왕이 미친 듯 웃어 젖혔다. 경평군이 은밀히 "전하 좀 그만 침수 드시게 하게."

하자 아지가 야멸치게 말을 잘랐다.

  "놔두세요. 지금 전하 가슴엔 초토만 휘날리고 있어요.

   가위에 눌려 잠도 사로주무십니다."  

 

                                                            <이몽 2부, 233p~234p>  

 

 

봉이의 죽음으로 참혹했던 왕이 슬픔을 잊기 위해 잠시 창덕궁을 떠나 거둥했던 경희궁...

처처(悽悽)함을 잊기 위해 경평군과 함께 종일 시를 외우며 안간힘쓰던 장면이다. 

명분은 지친 마음과 애통함을 정리하기 위해서이지만, 목적은 노상선, 상선, 도승지,

경평군과 함께 왕의 친위부대를 만들기 위한 비밀회동이다.

위의 시는 아지가 왕의 권유에 따라 시 한 수를 읊는 대목이다.

이 시는 작가가 지은 것일까? 아니면 어디서 인용한 것일까? 

 

나는 아지가 시를 읊는 장면을 만들기 위해 조선시대 기생들이 남긴 수백 편의 시를 읽었다.

그중에서 주저 없이 위의 시를 선택했다.

왕의 사랑은 얻지 못한 채 옥체만 맞이해 천침(薦枕)을 하는 아지의 허무한 심정을 표현하는데

가장 적합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더구나 아지는 왕의 총애를 받으면서도 직첩을 받지 못해 상궁에 머물러 있는 가련한 처지였다.

기생이 쓴 이 시는 작자미상이다.

 

기녀의 유래를 따지자면 신라의 원화(源花)이다.  

삼국사기의 신라본기(新羅本紀)에는 제24대 진흥왕 37년(576년) 봄에 처음으로 원화를

만들었다고 기록돼 있다.

인재를 찾다가 아름다운 두 여인을 발탁했으니, 바로 남모(南毛)와 준정(俊貞)이다. 

이들은 300여 명의 무리를 이끌었는데, 두 사람은 서로의 아름다움을 극도로 질투했다.

결국 준정이 남모를 집으로 유인해 술을 취하게 만든 다음, 강물에 던져 죽여버리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일로 인해 준정은 처형되고, 무리는 해체됐다. 

그뒤 신라에서는 아름다운 남자들을 뽑아 곱게 단장시키고 이름을 화랑(花郞)으로 불렀다.       

삼한(신라,후백제,후고구려)을 통일한 왕건은 백제 유민 중, 색예(色藝)가 있는 여종을

기생으로 삼아 화장을 시키고 가무를 연습시켰다. 바로 고려 여악(女樂)의 시초이다. 

 

                         

 

 

조선시대엔 기녀의 활동이 훨씬 광범위해졌다. 

드라마나 소설에서 왜곡되고 있는 의녀(醫女)와 침선비(針線婢), 다모(茶母) 등은 모두 기생이다.

의녀는 조선 태종 때 삼남지방의 관비 중 나이 어리고 영리한 기생을 뽑아 제생원에 소속시켰다가

뒤에 혜민서에서 침구술을 가르쳤다. 의녀는 내의원에 소속돼 있었지만 연회가 있을 때에는 춤과

노래를 하는 등 기녀노릇을 했기 때문에 일명 약방기생으로 칭했다.

침선비는 상의원에 소속돼 왕실의 바느질을 담당했지만, 역시 연회가 있을 때에는 기업(妓業)을

병행했다. 세속에서는 이들을 상방기생(尙房妓生), 옥당기생(玉堂妓生) 또는 양반기생으로 불렀다. 

문무를 겸비한 고급 관기들로 모든 기생의 롤모델인, 기생으로서 가장 출세한 일패기생들이다.

이패기생들은 재상과 거상들의 집을 은밀히 드나들며 매춘을 해 일명 은근짜(隱君子)로 불리었다.

삼패기생은 술시중과 매춘이 주업인 유녀(遊女)들이다.

 

엄격한 신분사회였던 조선시대...

양반과 상놈의 엄엄한 신분 차이는, 한 하늘아래 단일민족이라는 것조차 허용하지

못해 20세기 들어서야 단일민족이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선시대 기녀들 사이에서도 일패와 이패, 삼패처럼 엄격한 서열이 마치

하늘과 땅처럼 존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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