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꽃이 만발한 박명의 거리에 밤빛이 짙어지자 수곡 내평면에서 열리는
이회(里會)에 참석하기 위해 각 마을의 지도자 3백여 명이 횃불을 들고
속속 모여들었다. 회의를 주도한 유계춘과 이명윤, 이계열은 등방(燈榜)에
의지한 채 숙의를 거듭했다. 세 사람의 신분은 각각 달랐다.
40대 중반인 유계춘은 몰락한 양반이었다. 남명(南冥)의 실천적 학풍에
영향을 받은 유계춘은 봉건적인 착취 구조를 타파하기 위해서는 무장봉기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주민들에게 이회에서의 투표를 이렇게 독려했다.
투표하지 않고 탓하지 마시오!
자신이 살아갈 세상에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고 잘못된 것만을
책하는 것은 누워서 침 뱉기요.
뽑을 사람이 없어 뽑지 않았다...?
허나 그로 인해 뽑힌 자들이 이 나라를 재단하오.
이 나라의 백성이라면 그들이 나라를 재단하는 데 있어, 원치 않는
방향으로 가려는 것을 막으려는 열정을 가지고 있어야만 하오.
왜냐하면 그들의 행보가 민초들의 삶과 직결되기 때문이오.
그러니 그들이 세상을 망쳤다고 탓하지 마시오.
그런 자들을 뽑은 자신들을 탓하시오.
<이몽 2부, 298p>
마치 선거위원회에서 선거를 독려하는 듯한 이 대목!...
총선이 가까워 오면서 이몽을 읽은 독자들이 자주 질문하는 부분 중 하나이다.
정치에 신물이 나 평소 투표를 잘 하지 않던 독자들이 유계춘의 정문일침(頂門一鍼)에
뜨끔해져 과연 유계춘이 실존했던 인물인지, 투표를 독려하는 위의 대목이 과연 진짜
그가 한 말인지, 아니면 작가가 만들어 낸 말인지 궁금해 한다.
한마디로 대답하면 유계춘은 실존인물이다!
21세기인 지금 이 시대에 선거위원회에서 선거를 독려하는 것 같은 저 명언은
진주의 혁명가 유계춘이 정확히 150년 전에 했던 말이다.
역사는 수레바퀴처럼 돌고 돈다.
역사에서 교훈을 얻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현재 일어나는 일들은 몇 백년 전, 몇 천년 전에도 일어났던 일이다.
기원전 3,000년 전,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의 점토판에 쐐기글자로 쓰여있는
수메르의 격언을 한번 살펴보자.
남자는 행복을 위해 결혼한다.
그리고 깊이 생각한 후에 이혼한다.
놀랍지 않은가?
누군들 5천년 전 사람들이 이혼을 했었다고 상상이나 했겠는가.
지금 일어나는 일들은 수천년 전에도 똑같이 일어났었다.
상상을 초월하는 수메르 격언들이 쓰여진 점토판들은 현재 대영박물관, 루브르 박물관,
테헤란 박물관, 카이로 박물관, 베이루트 국립박물관 등의 수장고에 골고루 소장돼 있다.
세상 모든 일들은 인간이 지구에 존재하기 시작한 이후부터 변함없이 반복되고 있다.
인간사 모든 문제가 돈과 권력, 탐욕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역사는 철저히 현재성이자 현재진행형이다.
1862년 초봄에 일어난 진주민란은 철종의 훙어를 재촉한 대사건이었다.
세도정치로 삼정이 문란해지자 진주를 시작으로 전국 방방곡곡에서 1년동안 민란이
계속 일어났다. 옥체에 문제가 생겨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일어난 이 전국적인 소요는
철종 말기를 암흑기로 만들었다.
진주민란은 정확히 말해 진주 농민 항쟁이다.
항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주도적 역할을 한 사람은 이명윤과 유계춘, 이계열이다.
이명윤은 정종(定宗)의 15대 후손으로 명문가 양반이었다.
헌종대에 알성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 사헌부 감찰, 사간원 정원 등 두루
청요직(淸要職)을 역임한 지식인이었다.
철종대에는 홍문관 교리에 제수됐지만, 혼탁한 정치를 피해 벼슬을 사양하곤 향리에
은거 중이었다. 이계열은 이명윤과 6촌형제이지만 언문조차 모르는 일자무식꾼이었다.
그는 진주민란을 주도한 나무꾼패(초군)의 우두머리였다.
진주민란이 '초군(樵軍)의 난'으로도 불리우는 건 이 때문이다.
항쟁의 주동자인 유계춘은 학문적 소양이 있던 가난한 지식인이었다.
그의 9대조 유종지는 남명 조식 선생의 제자로, 선조때 정여립의 모반사건에 연루돼
처형됐다. 집안에 반골(反骨)의 피가 강하게 흐르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는 민란 이전부터 향회나 이회를 자주 주동하여 환곡의 폐단을 지적하고 여론을
주도해, 수시로 읍과 감영, 비변사에 강력히 해결을 호소하는 등 비대발괄했다.
온건파인 이명윤은 무장봉기를 주장하는 유계춘, 이계열과 멀어져 항쟁 직전 탈퇴했다.
유계춘은 수곡장시의 집회가 있은 다음날 병영에 체포됐다.
잠시 풀려났던 그는 비밀리에 초군들을 소집해 덕산장시를 공격하고 진주민란을 이끌었다.
철종은 진주민란을 조사하기위해 연암 박지원의 손자 박규수를 안핵사로 급파했다.
유계춘은 그에 의해 진주민란이 수습되는 과정에서 체포돼, 5월 30일 효수됐다.
일년 반 뒤, 철종도 파란만장한 삶의 끈을 놓고 보령 33세로 홀연히 사바세계를 떠났다.
민초의 가장 낮은 자리에서 인간의 탐욕과 거대 권력에 맞서 세상을 바꾸고 싶어했던 한 혁명가!
가난한 지식인의 말로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다.
허나, 민초들의 비분강개로 시작된 임술농민항쟁은 많은 희생과 대가를 치룬 뒤
동학이 뿌리내릴 수 있는 튼튼한 토양분이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32년 후에 동학농민혁명이 꽃필 수 있는 모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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