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걸음을 떼기 시작한 직후부터 영화를 보며 자랐다.
황홀한 놀빛을 뽐내던 단홍빛 채하(彩霞)가 어둠의 장막 속으로 천천히 스며들면,
어스름 박명(薄明)의 거리에선 망치질 소리가 요란했다.
우리집과 담장이 이어져 있는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는 일주일에 몇 번씩 영화 상영을
위한 대형화면이 설치되곤 했다.
동네와 인접한 자그마한 언덕에 자리잡은 국립영화제작소 덕분이었다.
집에 TV가 있는 게 은풍(殷豊)한 삶의 상징이었던 시절...
정부 정책이었는지, 국립영화제작소의 주민을 위한 서비스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초어스름이 되면 급히 허기를 채운 이웃동네 사람들까지 영화를 보러 학교로 속속
몰려들곤 했다.
운동장을 가득 메운 사람들은 영화 주인공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가슴 아파하며
혀를 차거나, 까르륵 웃고, 때론 한탄하며 시대의 억압적 고통과 궁곤한 일상을 잊으려
안간힘을 썼다.
유아시절부터 시작된 내 영화감상은 초등학교를 마칠 때까지 이어졌다.
그 후에도 한동안 드라마와 영화에 심취했다.
내가 소설을 쓰기에 앞서 영상 관련 일을 했던 건 어쩌면 당연한 수순인지도 모른다.
한때는 음악에 빠져 쇼팽 에튀드까지 기를쓰고 배웠다.
내가 문장의 리듬과 가독성을 중요하게 여기는 건 이 때문이다.
말이 없고 수줍음을 타던 나는 청소년기를 음악과 영화에 탐닉해 보냈다.
이런 성벽(性癖)은 고1 때부터 시작된 활자중독과 한학에 천착하기 전까지 계속됐다.
지금도 초어스름이 되면 내 기억의 한 모퉁이에는 유년시절 어둠이 자욱이 깔린 학교
운동장 바닥에 종이를 깔고앉아 영화를 보며, 이웃과 감정을 공유하고 시름과 번울함을
잊던 군상(群像)이 마치 정지된 화면처럼 반추되곤 한다.
독자들은 이몽을 읽고, 그 시대를 직접 살아보고 경험한 것처럼 글을 쓴다... 소설을
읽는 그대로 영화를 보는 듯 이미지로 연결된다... 이렇게 말하곤 한다.
이는 철저한 취재와 오랜 자료조사 때문이지만, 아마도 내 유년시절 탐기(貪嗜)의 영향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허나 내 글에서 보이는 엄격함은 활자중독이나 한학(漢學), 고전과 상관있을 터이다.
문학... 영화... 음악... 책... 간서치(看書癡)... 한학... 역사... 고존... 철학... 순우리말...
천문... 영성!...
내 인생을 관통한 이 이상스러우리만치 오묘한 조합이야말로, 어쩌면 내 글과 사상을
아우르는 키워드인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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