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례는 왕이 어의궁인 별궁을 찾아가는 친영(親迎)으로 시작됐다.
김문근의 딸은 삼간택 후, 인전 잠저였던 인왕산 기슭 어의궁에서
왕비수업을 받아 왔다.
행렬 맨 앞엔 어가의 출현을 알리는 선상군병이 도열하고, 그 뒤로
쇠꼬리를 장식한 독(纛)과 옥색 바탕에 큰 용이 그려진 교룡기를 든
의장대가 섰다.
또 초요기와 백택기, 벽봉기, 황룡기, 정묘기,원화작선 등의 깃발을
든 의장대가 왕실의 위엄을 사방에 떨쳤다.
군악대인 내취와 고취악대도 화려한 의장복을 입고 도열했다.
그러나 국혼에서는 악대만 진설하고 연주는 하지 않았다.
<이몽(異夢) 1권, 285~286p>
그동안 TV 드라마와 소설, 뮤지컬, 연극 등에서 가장 오류를 범해 온 게 바로 이 부분이다.
소설이건, 사극이건, 뮤지컬이건, 왕의 결혼식 때는 구장복을 입은 왕과 대례복 적의를 입고
대수머리를 한 왕비가 인정전 앞 어도를 걸어갈 때 장중한 음악이 흘러나왔다.
허나 이는 매우 엄중한 역사왜곡이다.
王의 혼례식 때는 악대만 진설하고 음악은 연주하지 않았다.
왕의 혼례는 가례(嘉禮)에 속한다.
왕실은 물론이고 전 백성이 축하해야 할 최대의 경사였다.
한데, 왕실의 혼례에서는 악기만 배치하고 음악을 연주하지 않았다.
흉례(凶禮)인 국상에서의 진이불작(陳而不作)은 이해가 가지만, 가례에 해당하는 혼례에서
음악을 연주하지 않은 건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 때문이었을까?
이는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만들 때 <예기(禮記)>에 나오는 공자의 발언을 수용했기
때문이다.
<예기>의 '증자문(曾子問)'에서 공자는 증자의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부인을 맞이하는 집에서는 3일 동안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데,
이는 어버이를 계승함을 생각하기 때문이다.
무슨 뜻일까?...
혼례 자체는 기쁜 일인 게 분명하지만, 이는 결국 어버이를 대신하여 그 일을 계승하는
것이므로 책임감과 부담감이 있어 그저 기뻐할 수만은 없는 일이라는 의미이다.
조선에서는 국조오례의를 만들 때 왕세자 혼례 때 악기를 배치하기만 하고 연주는
하지 않는 것으로 규정했다.
그러나 1460년(세조6년), 세조는 왕실의 혼례에 음악을 연주하게 했다.
그 후, 조선 제9대 왕인 성종은 1488년(성종19년), 왕실 혼례에서 음악을 연주하지 않는
것으로 결정했다.
이후, 왕실의 결혼에서는 악기만 진설하고 음악은 연주하지 않았다.
국왕의 혼례 절차는 청혼하는 납채(納采), 혼인이 이루어진 증표로 보내는 의식인
납징(納徵), 길일을 손택하는 고기(告期), 왕비로 책봉하는 의식인 책비의(冊妃儀),
왕비를 맞아들이는 봉영(奉迎), 혼인 후에 잔치를 베푸는 의식인 동뢰(同牢)의 순으로
진행됐다.
동뢰가 끝나면 왕비가 왕대비에게 조회하는 왕비조왕대비(王妃朝王大妃), 왕비가
백관들의 하례를 받는 왕비수백관하(王妃受百官賀), 왕이 백관들을 하례하는 전하회백관
(殿下會百官), 왕비가 외명부의 조회를 받는 의식인 왕비수외명부(王妃受外命婦)의 의식이
차례로 이루어진다.
이때 모든 주악 절차, 즉 납채, 납징, 책비, 봉영 절차의 교서함을 이동할 때와 임금을 회례
하는 절차에서 악대만 진설하고, 연주는 하지 않았다.
바로 진이불작(陳而不作)이다.
이런 사실을 몰랐던 건 작가들이 1차 사료인 실록과 경국대전, 국조오례의 등을 공부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아직도 왕의 혼례 장면 때면 으레 장중한 음악이 흘러나오곤 한다.
제작진이나 편집자, 자문을 맡은 학자들 또한 이 사실을 모르거나, 혹여 사실을 알고 있는
일부 학자들 또한 방기하고 침묵하므로서,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역사왜곡이
이어지고 있다.
역사관련 작품을 쓰는 작가는 최소한 실록과 경국대전, 국조오례의는 기본적으로 공부
해야 역사왜곡의 질긴 끈을 끊어버릴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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