흥선군이 눈에 핏발을 세운 채 다시 충성을 맹세했다.
"이는 종실을 바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안동 김씨들로부터 유린당한
종묘사직을 바로 세우기 위함입니다. 통촉하시옵소서!"
"한데, 그 일을 왜 하필 흥선군 2자가 해야 된답니까? 왕위를 빼앗긴 인손이라면 또 모를까..."
흥선군 입가에 파르르 경련이 일었다. 깊숙이 감춘 욕망을 만천하에 들킨 것처럼 얼굴이 홧홧했다.
거센 불꽃을 이기지 못한 눈 속 실핏줄이 터져 금세 토끼눈이 되었다.
이를 곁눈질하던 신정왕후가 까르륵 배꼽을 잡고 웃었다.
"오늘은 예까지만 합시다."
대왕대비의 회진작소에 흥선군이 입에 거품을 물고 송백지교를 맹세했다.
"각골난망이옵니다. 오늘의 약조를 영원히 가슴에 새기겠나이다."
흥선군 등짝을 날카롭게 노려보던 신정왕후가 낮은 소리로 중얼거렸다.
"내 흥선군 제의를 곰곰히 생각해 보리다. 오늘은 그만 돌아가세요."
얌치가 빠진 흥선군이 벌떡 일어나 돈수재배했다.
암상한 표정을 짓던 대왕대비와 제조상궁 눈에서 경멸과 공모자의 은밀함이 햇살처럼 쏟아졌다.
이마에 바닥을 대고 샛눈을 뜨고 있던 흥선군이 빙그레 웃으며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자벌레가 몸을 굽히는 건 몸을 펴기 위함이다!
오래 엎디어 있을수록 높이 난다.
여롱지주만 손에 넣을 수 있다면, 난 기꺼이 악마에게 영혼까지도 팔 수 있다.
탐다무득한 늙은이 앞에 지금 코를 처박고 있는 건 결코 비굴함 때문이 아니다.
내 아들 재황을 조선의 스물여섯 번째 왕으로 세우기 위함이다.
내 아들의 아들로 조선의 맥을 이어가기 위해서다.
안동 김씨들에게 빼앗긴 왕권을 다시 되찾기 위함이다.
달이 밝게 빛나면 별빛은 희미해지는 법...
새로운 영웅이 나타나면 군왕의 존재는 흐려진다.
시간의 강물이여, 빨리 흐르라!
어서 흐르라, 극구광음으로 흐르라!
절치부심하며 인고의 세월을 견뎌 온 나 흥선군이 여기 있다.
오랫동안 새 시대를 꿈꿔 온 내가 풍운지회(風雲之會)를 기다린다.
썩은 세도정치를 발본색원해 인순고식을 타파할 새 시대, 새 주인이
새로운 정치를 펼치고자 한다.
운명의 서판(書板)을 들고 계신 신이시여!
부디 제 손을 잡아 새로운 역사로 인도하시기를...
<이몽 2부, 253~254p>
인간사 세리지교(勢利之交)의 극치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똑같다. 탐욕의 역사는 지금도 반복된다.
역사를 통해 우리가 교훈을 얻어야 하는 이유이다.
권력을 잡기 위해서는 어느 시대이건 연대와 연합, 결탁과 음모가 난무한다.
그 뒤엔 논공행상을 따지며 배신과 숙청, 토사구팽, 분한(忿恨)이 이어진다.
그때... 신정왕후는 자신의 앞날을 전혀 예측하지 못했을까?
아니, 그녀도 흥선군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넌지시 흥선군의 심중을 떠보기도 했다.
"권력은 씨앗과 같아 둘로 나눌 수 없음은 만고의 진리입니다. 고래의 모든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는 터, 황차 흥선군 약조가 어디 그리 쉽게 지켜지겠습니까?"
경련이 일던 흥선군 눈이 놀빛처럼 붉게 타올랐다.
"씨앗 나름입니다. 나누는 자의 심성 나름입니다.
둘로 잘만 나눈다면 두 개의 싹을 틔울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권력 앞에서는 수치심이 없다. 수치심이 없으면 양심도 존재하지 않는다.
신정왕후는 고종을 자신의 양자로 삼아 즉위시키고 2년간 명목상의 수렴청정을 한 뒤,
계륵(鷄肋) 같은 존재로 길고긴 여생을 보냈다. 그로 인해 철종의 왕통은 끊어졌다.
그후, 정치의 전면에 나섰던 사랑하는 조카 조성하를 비롯해 많은 친정세력들이
정변에 휘말리며 흥선대원군에 의해 참변을 당했고, 풍양조씨 가문은 일시에 쇠락했다.
신정왕후는 1890년, 83세의 나이로 창덕궁 낙선재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할 때까지
"죽지못해 살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한탄하며 통한의 삶을 살았다.
탐욕의 역사가 낳은 결과이다.
역사는 지금도 수레바퀴처럼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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