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테고리 없음

평화

아라홍련 2010. 4. 21. 12:41

오랫만에 평화를 느낍니다.

몇 년 동안 1년 365일을 대학 도서관으로 출근했던 저는, 사흘 동안 도서관에 가지 못했습니다.

이번 주가 대학생들 중간고사 기간이기 때문이죠.

대학의 시험 기간은 3주입니다.

일정으로 정해진 기간이 있지만, 한 주 먼저 시험을 보는 과가 있고 대개 2주에 걸쳐

시험을 봅니다.

공대 같은 경우엔 한 주 나중에 시험을 보기 때문에 결국 중간고사 기간은 3주인 셈입니다. 

2년 동안은 중간고사 건, 학기말 고사 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도서관엘 갔습니다.

한데 이번엔 상황이 좀 달랐습니다.

9시에 도서관 문을 여는데, 학생들이 8시부터 줄을 서서 기다리니 이건 어찌 할 도리가

없습니다.

자리를 차지한다고 해도, 대기하고 있는 학생들을 보면 가시방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 

마음이 불편합니다. 한마디로 스트레스 만땅입니다.

직원들이 보내는  노골적인 눈치도 제겐 심한 스트레스입니다.

올해는 수시로 방송까지 합니다.

10분 만 자리를 비워도 소지품을 치우겠다는 협박(?)이 계속 됩니다.

설마... 했는데, 정말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소지품을 다 치웁니다.

그 자리엔 득달같이 다른 사람들이 앉습니다.

하루 20여 시간 도서관과 열람심을 오가는 저는 자리를 뺏기지 않기 위해  밥까지

굶게 생겼으니. 이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밥 한끼 먹자고 구내식당을 달음박질 쳐 갔다오면, 아~ 정말 생각이 복잡해집니다.

이 나이에 대체 이런 생활이 가당키나 한 것인가...?

내 또래면 세계여행이나 크루즈 여행을 다니며 우아하게 인생을 즐길 나이인데,

하루에 20시간 씩 공부와 작업를 병행해야 하는 이런 극한 생활이 이 나이에 가당키나

한 것인지 요즘들어 생각이 부쩍 많아지곤 합니다.

그 때문인지 전 영산강 둘레길과 지리산 둘레길을 트래킹 하는 꿈을 자주 꿉니다.

실크로드도 가고 싶고, 중국 계림과 장가계도 가고 싶고, 티벳도 가고 싶습니다.

늘 자연을 그리워하며, 머지 않아 찾아갈 날을 고대하며 몸과 마음을 위로합니다.

 

오랫만에 심호흡을 하며 베란다에서 아파트 주위를 둘러보았습니다. 

흐드러지게 핀 목련꽃이 고아한 자태를 한껏 뽐냅니다.  

양지에 핀 철쭉꽃도 꽃 필 준비를 하며 벌써 발록거립니다. 

개나리는 만개한지 오래된 듯, 농염한 색깔을 자랑합니다.   

꽃의 아름다움에 흔연해진 전, 라벤다와 로즈메리를 섞은 아로마 향을 촛불 위에 얹습니다.

금방 진한 꽃향기가 집안 구석구석으로 퍼져 나갑니다.

유키 구라모토의 CD를 켭니다.

정감있고 익숙한 아름다운 선율이 도서관처럼 변한 집을 아름다운 호숫가 주변인지,

광대한 푸른 초원인지 구분이 안 가게  만듭니다.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빼서 마십니다.

원두의 진한 향기에 심호흡 하던 저는 잠시 전율합니다.

 

아침부터 택배기사 만 기다리고 있는 중입니다.

김밥 한 줄과 컵라면 한개로 하루를 버티다가 영양실조로 세번이나 쓰러졌던 저는

한동안 대학교 구내식당에서 식사를 해결했습니다.

한데, 도서관을 가지 않고 집에 있는 사흘 동안 제대로 된 식사를 하지 못했습니다. 

어젠 결국 인터넷으로 유기농 야채와 색색의 파프리카를 주문했습니다.

택배가 도착하면 맛있는 쌈장을 만들어 사흘만에 처음으로 식사다운 식사를 할 예정입니다. 

하루하루가 자기와의 싸움인 저는, 오늘도 책과 노트북으로 중무장 한 채 용맹정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