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暴炎)과 부침개
* 연일 폭염(暴炎)의 연속이다.
요즘 매일 더위에 시달리다 보니, 따뜻한 옷을 챙겨 시원한 나라로 여행을
떠난 친구들 생각이 하루에도 몇 번씩 나곤 한다.
다 때가 있는 것을...!!
휴가철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이 시기는 도저히 견디기 힘들 정도의 폭서(暴暑)가 맹렬한 때이다.
이럴 땐 휴가를 떠나는 게 좋을 것이다.
더위에 약하다면 시원한 나라로 피서(避暑)를 가는 게 현명한 일일지도
모른다.
한데, 난...!?
휴가를 떠나지 못한 채 매일 책 읽는 일과 작업에 시달리며 이 무더위에
몸서리치다보니, 착잡한 기분을 떨칠 수가 없다.
더위와 열대야에 시달리다 보니, 집중력도 약해진다.
그럴 때마다 시원한 나라에 있는 친구들 생각이 간절하다.
오후 6시 즈음, 친구에게 택배를 보내기 위해 우체국을 다녀왔다.
마감 시간 안에 가기 위해 허둥지둥 우체국으로 향했다.
택배 신청을 하려 했더니, 휴대폰을 가져오지 않아 주소를 알 수가 없었다.
그 더위에 다시 뛰어와 휴대폰을 가지고 달음박질 쳐 겨우 마감 시간 안에
택배를 보낼 수 있었다.
돌아오는 길...
아파트 앞 도로에 늘 좌판을 펴놓고 농사 지은 것을 파는 할머니를 차마 그냥
지나칠 수 없어, 혹시 뭔가 팔아줄 게 있나 보기 위해 가까이 다가갔다.
나를 본 할머니는 반색을 하며 옆에 있던 사람들에게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아유, 이 아줌마가 이쁘기만 한 줄 알아요?
얼마나 정이 많다고...!
전엔 늘 부침개를 부쳐서 나한테 자주 갖다주곤 했어요.
부침개를 얼마나 맛있게 잘 만든다고.
덕분에 여러 사람들과 잘 나누어 먹곤 했지.
그래서 전엔 내가 늘 딸이라고 불렀어요.
할머니 옆에 있던 사람들은 나를 보고 따뜻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전엔 내가 늘 딸이라고 불렀지." 라고 과거형으로 표현한 건, 할머니가
사람들한테 "내 딸이야."라고 소개할 때마다 내가 곤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랫동안 봐 온 할머니는 어느날부터인가 나만 지나가면 사람들한테...
"내 딸이야.",
"내 딸이에요." 라고 자랑을 하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난 노골적으로 민망한 표정을 짓곤 했다.
사람들이 나를 정말 딸이라고 생각할까 봐 염려스러웠고, 또 나이 차이를
봐서도 그렇게까지 말하는 건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때문에 어느날부터인가 자연스럽게 할머니를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근 몇 년간은 일정이 바쁜데다 만날 수가 없어 할머니에게 부침개를
만들어다 주지 못했다.
그래도 어쩌다 마주치면 할머니는 팔던 물건을 봉지에 거저 담아주며, 가져가
먹으라고 강제로 쥐어주곤 했다.
집에 돌아온 나는 즉시 김치전을 만들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늘 사람들에게 부침개를 자랑하는 것을 볼 때, 그동안 내가 만들어다
준 부침개는 할머니에게 단순한 먹거리가 아닌듯싶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맛있게 익은 배추김치와 양파, 해물가루 등을 넣고 포도씨 기름으로 부침개를
정성스럽게 만들었다.
갖다주는 길에 경비 아저씨들에게도 주기 위해 부침개 3장을 더 만들었다.
* 내가 부침개를 들고 아파트 앞으로 갔을 때, 할머니는 유모차에 몸을 의지한 채
막 횡단보도를 건너고 있었다.
나는 "할머니!"를 외치며 급히 횡단보도를 건넜다.
나를 본 할머니는 반색을 하며 "왠일이냐?"고 물었다.
"하마터면 못 뵐뻔 했네요. 부침개 가져가서 드세요." 했더니 할머니는...
"괜히 부침개 얘기를 해서 이 더위에 고생을 하게 했다."며 매우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아녜요, 할머니! 그런 생각하지 마세요. 가서 맛있게 드세요." 했더니,
할머니가 갑자기 내게 고구마 줄기를 다듬은 것을 쥐어주었다.
조금 전에 팔던 물건이었다.
나는 펄쩍 뛰며 사양했지만, 할머니도 쉽게 물러서지 않았다.
할머니와 난 횡단보도가 끝나는 길에서 한동안 실랑이를 했다.
결국 할머니의 고집을 꺾지 못하고, 난 고구마순을 받아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 그러고 보니... 정(情)이란 건 이렇게 서로를 생각하는 따뜻한 마음만 가지고도
깊어지고 또 재생산된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비록 부침개 만드느라고 폭염에 땀 흘리며 고생은 좀 했지만, 경비 아저씨들도
부침개 몇 장에 그렇게 기뻐하고, 할머니도 기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생각지 않게 고구마순까지 선물로 받은 내 마음도 덩달아 따뜻해졌다.
받은 것 못지않게, 주는 마음의 기쁨도 크다는 것은 진리(眞理)이다.
It is twice blest.
It blesseth him that gives and him that takes.
(자비를 베푸는 일에는 이중의 축복(祝福)이 따른다.
자비는 그것을 주는 사람을 축복하고, 또 그것을 받는
사람에게도 축복이 된다.)
... 바로 자비심(慈悲心)의 본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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