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시(漢詩)
謝趙先生見訪
(조선생의 방문에 감사하며)
多君觸氷雪 자주 그대 얼음과 눈 밟고
山路夜相過 산길따라 밤에 왔다 갔다 했지요
剪燭更籌永 촛불 자르니 다시 심지 길어지고
開樽春氣和 술동이 여니 봄기운이 화했죠
淸談飜海水 맑은 이야기에 바닷물이 출렁이고
逸興動星河 지극한 흥취에 은하수도 움직였죠
厚意誠難忽 후의에 정성이 소홀하기 어려워
吟成一曲歌 노래 한곡 지어 읊어 드립니다
~* 원천석(元天錫, 1330~ ?) *~
* 원천석
고려말 조선초의 학자이자 문인.
字는 자정(子正), 號는 운곡(耘谷)이다.
원주 아전층의 후손으로 종부시령(宗簿侍令)을 지낸 윤적(允滴)의 아들이다.
문장과 학문으로 경향간(京鄕間) 모두에서 이름을 날렸으나, 진사(進士)에
합격한 뒤 출세를 단념하고 사로(仕路)에 나서지 않아 관계에 진출하지 않았다.
고향에서 농사를 지으며, 평생을 은사(隱士)로 보냈다.
비록 은자(隱者)의 삶을 살았으나,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격변하는 시국을
개탄하며 현실을 증언하는 사명감으로 이를 역사에 기록하려 애썼다.
원천석은 이방원이 조선 제 3대 왕 태종으로 즉위하기 전의 스승이다.
태종이 즉위 후 여러 차례 불렀으나, 조선의 개국 과정과 그의 비정상적인
권력욕에 실망해 일체 협조하거나 응하지 않았다.
심지어 태종이 친히 찾아와도 자리를 피해 만나주지 않았다.
결국 태종이 아들인 세종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난 뒤에야, 백의(白衣)를 입고
한양으로 와서 태종을 만났다.
원천석은 고려 충신 두문동 72현(杜門洞 七十二賢) 중 한사람이다.
두문동(杜門洞)은 고려의 충신들이 조선의 건국을 반대하면서 고려의 신하로
남기로 맹세한 뒤 72명의 충신들이 모여 살던, 지금의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光德山) 서쪽과 만수산 남쪽에 위치한 곳을 말한다.
태조 이성계가 등극하면서 고려의 신하들을 위로하기 위한 과거장(科擧場)을
설치했으나, 이들은 절개를 지켜 끝내 과거장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개성의 북쪽 고개 마루에 조의(朝衣)와 조관(朝冠)을 걸어놓고, 만수산
(萬壽山)으로 들어갔다.
후에 이들이 넘은 고개를 부조현(不朝峴), 조의관을 걸어 둔 곳을 괘관현(掛冠峴),
또 이들이 함께 은둔했던 곳을 두문동(杜門洞)으로 불렀다.
이는 고려 충신 72명이 이곳에 들어와 마을 동쪽과 서쪽에 문을 세운 뒤, 빗장을
걸어놓고 세상 밖으로 나가지 않은 것에서 유래됐다.
'꼼짝하지 않고 들어앉아 있는 사람'을 지칭하는 두문불출(杜門不出) 이라는
고사성어는 바로 여기에서 비롯된 것이다.
조선 건국 초기에는 '두문동'에 대해 언급하는 것조차 금기시했다.
그러나 후세에 절의(節義)의 표상으로 숭앙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350년이 지난 1783년(정조 7년), 왕명으로 개성의 성균관에다 표절사
(表節祠)를 세워 배향하게 했다.
이로써 두문동 72현의 실체가 기록으로 남게 됐다.
원천석의 작품으로는 <회고가(懷古歌)>와, 문집으로 <운곡시사(耘谷詩史)>가
전해지고 있다.
이 문집은 고려와 조선 왕조 교체기의 역사적 사실과 그에 관한 소감 등을 매우
날카롭게 1,000 수가 넘는 詩로 읊은 것이다.
그래서 제목에 시사(詩史)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후세의 사가(史家)들은 모두 '원천석'의 증언을 자료로 삼아 여말선초(麗末鮮初)의
급박했던 상황을 그대로 역사적 사료로 기록에 남겼다.
위의 詩에서 일흥(逸興)이란... '지극한 흥취'나 '아주 흥미 있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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