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조의 사패 14, 영우락(永遇樂)
永遇樂
(영우락)
落日鎔金 석양은 금을 녹인 듯하여
暮雲合璧 저녁 구름과 합하여 옥이 된다
人在何處 그대여 어느 곳에 있나
染柳烟濃 버드나무에 번진 안개 자욱하고
吹梅笛怨 매화 피리는 원망의 노래 부른다
春意知幾許 봄 뜻을 얼마나 알고있나
元宵佳節 원소절 즐거운 계절에
融和天氣 천기와 융화하니
次第豈無風雨 순차로 비비람 따위 없을 수 있나
來相召香車寶馬 좋은 수레와 값진 말 불러
謝他酒朋詩侶 술 친구, 글 친구들을 대접하리라
中州盛日 중주 고을의 좋은 날
閨門多暇 규원에는 많은 여가 많아라
記得偏重三五 어린시절 일들 두루 생각나니
鋪翠冠兒 비취관을 늘어쓴 사내들
撚金雪柳 금빛 흰빛 버들가지 비벼붙여
簇帶爭濟楚 가지런하고 아름다운 요대 만들었네
如今憔悴 이제는 그 모습 초췌해져
風鬟霧鬢 머리엔 바람들고 서리마저 내렸다
怕見夜間出去 밤중에 나가기도 두려워
不如向簾兒底下 주렴 향해 그 아래 앉아
聽人笑語 사람들의 웃음소리 듣는 것만 못하네
~* 이청조(李淸照) *~
* 그동안 수옥(漱玉) 이청조의 사(詞)를 소개하며 여러번 언급했지만, '이청조'는
중국 최고의 여류 문학가이다.
비록 여인의 몸이지만, 사(詞牌, 곡조)의 풍격으로 치자면 '주방언이나 '유영'과
견줄만한 인물이다.
가장 세련되고 아름다운 운율과 섬세하면서도 정제된 감성을 잘 표현해낸다.
그녀가 남긴 몇 안 되는 사(詞)와 시(詩), 지극히 적은 문장이라 하더라도 특출나지
않은 게 하나도 없다.
때문에 중국 문학사에서 여류 사인(詞人) 중, 가장 빛을 발했던 인물로 꼽힌다.
위의 사(詞) 영우락(永遇樂)은 원소절(元宵節)을 감상한 노래이다.
'원소절'은 정월 대보름을 뜻한다.
원소절이 풍속을 자리잡게 된 것은 한대(漢代) 초기로 알려져 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한(漢) 무제(武帝) 때, 한나라 왕실에서는 '태일(太一)'일이라는
神에게 제사를 지내고 있었다.
전하는 바에 의하면 '태일'은 상당히 유명한 신으로 그 지위가 오제(五帝)보다도 높고,
한나라 황제들에게 많은 은덕을 입혔기 때문에 그 제사가 성대했다고 전해진다.
한나라 문제(文帝) 때에도 원소절과 관련된 기록이 전하고 있다.
漢代 초기에 막강 권력을 휘두르던 '여태후'가 죽은 후, 그의 일족이 정변을 일으켜
제위를 찬탈하려는 모의를 꾸몄다.
그러나 이 음모가 유씨 종실의 제왕인 '유낭'의 위에 들어가자 이들은 급히 손을 써서
여씨 일족을 토벌했다.
이로써 위급했던 일촉즉발의 '제여지란(諸呂之亂)은 평정됐다.
이들은 유방(劉邦)의 둘째 아들인 유환(劉桓)을 황제로 옹립했다.
... 그가 바로 문제(文帝)이다.
한 文帝는 즉위한 후에, '제여지란'을 진압한 날인 정월 15일을 기념일로 정한 뒤
원소절(元宵節)이라 이름 붙였다.
이때부터 매년 정월 15일이 되면, 한나라 문제는 궁궐 밖으로 나가 백성들과 함께
원소절을 즐겼다고 전해진다.
원소절에는 각지에서 '위앤사오(元宵)'를 먹고 관등놀이를 하는 풍속이 있다.
원소(元宵)는 찹쌀가루를 반죽하여 둥글게 만들고, 그 속에 소를 넣은 음식을 말한다.
이것은 "온가족이 한자리에 모인 것"을 의미한다.
원소절에 채색 등롱을 구경하는 것은 서기 1세기 한(漢) 명제(明帝) 때 시작됐다.
그 후에 경성과 민간에서는 모두 등불을 장식하는 행사를 했는데, 이것을 등회(燈會)
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밤새도록 거리에서 꽃등을 구경하며 자유롭고 즐겁게 보냈다.
근대에도 중국에서는 원소절 때, 관등놀이가 여전히 성행하고 있다.
또 지방이나 농촌에서는 불꽃놀이와 채고교, 용등춤, 사자춤, 모내기춤과 같은
오락활동을 즐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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