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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들은 어디에서 눈 구경을 했을까?

아라홍련 2013. 1. 9. 04:23

 

         

 

 

      창덕궁(昌德宮)은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가 1395년에 법궁으로 지은 경복궁에 이어서

       그의 다섯 째 아들인 태종 이방원이 10년 후에 지은 조선의 두 번째 궁궐이다.

       왕위 계승권을 둘러싸고 두 번이나 '왕자의 난'을 일으킨 태종은 형제들을 죽이는 골육상쟁을
       벌인 뒤, 조선 제 3대 왕으로 즉위했다.
       둘째 형인 정종이 수도를 개경으로 옮긴 터라 그곳에서 즉위한 태종은 즉위 5년(1405년),

       다시 수도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고민에 빠졌다. 

       경복궁은 많은 형제들을 살해한 골육상잔(骨肉相殘)의 현장이 남아있는 곳이자,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제거한 꺼림칙한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운 궁궐을 매봉 산자락 아래 지었으니, 바로 창덕궁이다.
       신하들이 태종에게 법궁인 경복궁에서 지낼 것을 매번 강력히 주청했지만, 태종은 풍수지리를
       내세워 자신의 심경을 솔직히 밝혔다.
 
                  내가 어찌 경복궁을 유명무실한 것으로 만들어서 쓰지 않는 것이냐?
                  내가 태조께서 처음으로 창설하신 뜻을 알고, 또 지리의 설(說)이 괴상하고

                  헛된 것을 알지만, 술자(術者)가 말하기를 '경복궁은 음양의 형세에 합하지 않는다.'

                  하니, 내가 듣고 의심이 없을 수 없으며 또 무인년 규문(閨門)의 일은 내가 경들과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일이다.

                  어찌 차마 경복궁에 거처할 수 있겠는가? 

 
       여기에서 '규문의 일'이란, 아버지인 태조 7년에 이방원(태종)이 주도하여 조선 개국의 주역
       정도전과 이복동생 방석(方碩)을 죽인 사건을 말한다. 
       산림이 우거진 산자락에 만들어진 산중궁궐 창덕궁의 아름다움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하다. 
       창덕궁은 경복궁이나 중국의 자금성처럼 기하학적으로 궁궐의 배치를 통제하는 인위적인

       건축물이 아니라, 북악의 매봉을 등지고 14만 5천여 평의 산자락에 자리 잡아 지형적 특성에

       따라 자유로운 배치를 했다.

       그럼에도 지형과 건물 사이에 엄정한 질서와 균형미를 가지고 있어 전체적으로 편안하고

       아름다운 조화를 이룬다.

       그러나 경복궁과 창덕궁 등 한양에 있는 모든 궁궐은 선조 25년(1592년)에 일어난 임진왜란 때
       모두 불타서 사라지고 만다. 

       광해군은 창덕궁을 재빨리 재건해 사용하기 시작했다.

       경복궁은 그 터가 불길하다는 이유로 재건하지 않고 270년 이상 폐허로 방치되다가 고종 2년인
       1865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다시 지어졌다.    
       때문에 창덕궁은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궁궐이 됐고, 그 가치와 아름다움을 인정

       받아 1997년,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됐다.

       창덕궁 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곳은 단연 후원(後苑)이다.
       궁궐 북쪽에 있다고 해서 북원(北苑), 임금 허락 없이 함부로 들어갈 수 없는 곳이라고 해서

       금원(禁苑), 궁궐 안에 있는 동산이라 내원(內苑), 동산을 관리하던 아문인 상림원(上林園)의 

       이름을 따서 상림(上林)으로 불렸다.   

       창덕궁 후원의 아름다움은 많은 궁궐들 중에서도 가히 독보적이다.  

       천년을 넘은 느티나무와 750년이 넘은 향나무, 650년은 넘을 다래나무, 400년이 넘은 뽕나무,

       500여 년은 족히 되었을 회화나무, 그리고 수백 년이 넘은 단풍나무들이 밀밀하다.      

       창덕궁은 북악산 매봉 자락에 터를 잡아 지어서 궁궐의 주요 전각들은 낮고 평탄한 남쪽에

       있고, 지형이 높은 북쪽 산등성이 쪽으로 후원이 자리 잡고 있다.

       수백 년 동안 금원으로 산을 보호해 왔기 때문에 다양한 수종과 고목들, 새들의 천국이기도

       하다.

       현재 후원의 면적은 9만 평으로 전체 면적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한데도 후원 모습이 산골짜기에 숨겨져 있어, 외부 시선과 노출을 철저히 차단하는 절묘함이 

       있다. 

 
       하지만 후원이 처음부터 이렇게 넓었던 건 아니다.
       후대왕들이 점차 후원의 영역을 넓혀갔다. 특히 세조가 후원의 영역을 크게 넓혔다.
       세조 8년(1462년)에는 매봉의 맥(脈)을 후원 안으로 넣기 위해 후원 동쪽에 인접한 민가 73채를

       철거했고, 이듬해에는 후원 북쪽에 있던 민가 58채를 추가로 철거했다.

       화려한 걸 좋아한 연산군은 후원에 영산홍 1만 그루를 심게 했고, 인조는 후원에 많은 정자를 

       지었다.

       후원 가장 깊숙한 곳에 바위를 깎아 옥류천을 만들고, '옥류천(玉流川)이란 글자를 친히 써서 

       바위에 새기게 했다.

       또 산수가 빼어난 곳마다 정자를 지었다. 
       현재 후원에 남아있는 고색창연한 정자는 대부분 인조 때 만들어진 것이다.  
       순조 때에는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익종)가 단청되지 않은 의두합과 연경당을 질박하게

       지어 창덕궁 후원의 운치(韻致)를 완성시켰다. 

       많은 왕들이 물이 흐르는 골짜기를 따라 연못을 파고, 적당한 언저리에 정자를 지어 자연을

       벗했다.

       격무에 지친 왕들은 지친 몸과 마음을 달래기 위해 후원을 즐겨 찾아 거닐며 풍치를 감상하고,

       시인이 되어 많은 詩를 남겼다.

 
       특히 감상적이면서 연하지벽(煙霞之癖)이 있던 숙종은 후원을 샅샅이 찾아 풍광 좋은 곳에

       정자를 만들고, 경치를 감상하며 많은 시를 지었다.

       창덕궁 후원은 춘하추동 변화에 따라 각기 개성있고 고유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어 역대 

       왕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지만, 특히 한겨울 눈이 내리는 설경(雪景)이 왕들의 크나큰 사랑을

       받았다.

       그렇다면 조선의 왕들은 창덕궁 후원 어디에 가서 눈 구경하는 것을 즐겼을까?
       바로 능허정(凌虛亭)이다.
       이는 왕들이 남긴 시(詩)로 확인이 가능하다.
   

 

        
                                                                                                       <능허정>   

 

       능허정은 숙종 17년(1691년), 창덕궁 후원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로 해발 90미터에 이르는 곳에

       단순하고 소박하게 만들어졌다.  
       후원의 가장 깊고 높은 곳에 위치해 있어, 한양 전체가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능허(凌虛)란, '하늘을 오른다', '허공에 오른다'는 뜻으로 후원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르는

       것을 비유한 말이다.

       또 "정신세계가 세속을 초월한다."는 의미도 내포돼 있다.

       '능허'란 단어는 중국 위(魏)나라 시인 조식(曹植)의 詩 칠계(七啓)에서 유래됐다.
 
                       화려한 전각이 구름에 닿고, 나는 섬돌이 허공에 오르네[凌虛].
                       아래로 흐르는 별을 내려다보고, 우러러 팔방을 바라보네.
 
       한겨울 눈꽃이 나풀나풀 내리기 시작하면, 왕들은 창덕궁에서 가장 높은 능허정에 올라가서

       산과 한양의 설경을 감상하며 저마다 시를 남겼다.    

      숙종은 '능허정에 올라 눈 그친 경치'를 <능허정제설(凌虛亭霽雪)>이란 詩로 남겼다.
 
                             하룻밤 바람이니 눈빛이 가득하여,
                             눈 밟고 누(樓)에 오르니 개인 경치가 새롭구나.
                             무엇보다 상림(上林)의 비할 데 없이 기이한 경치는
                             수많은 바위와 나무가 모두 은(銀)과 같음이라.
 
      정조도 한겨울 능허정에 올라 <능허정모설(凌虛亭暮雪)>이란 제목으로, '해 저물 무렵 능허정

        에서 보는 눈 내리는 경치'를 詩로 읊었다.

 
                              세모는 완연하고, 해는 저물려 하는데
                              평평 쏟아지는 눈 예쁘기도 하구나.
                              잠깐 사이 산과 들에 뿌리고 지나가니,
                              눈 덮인 나무가 아름다운 꽃이 되어 앞뒤로 감쌌네.
 
       순조 또한 '능허정에서 눈 그친 후 바라본 경치'를 <능허설제(凌虛雪霽)>란 詩로 노래했다.
 
                               옥 같은 눈 쌓인 곳에 번거로운 세상은 씻어지고,
                               눈 개자 날씨는 차고 달빛 새롭다.
                               능허정에 앉아 바라보노라니
                               도성(都城)의 나뭇가지 모두가 은빛이로구나.
      
         많은 왕들이 능허정의 설경을 노래한 詩를 남긴 것을 볼 때, 조선시대엔 눈이 많이 내리면

         임금은 으레 후원 정상에 있는 능허정에 올라 눈구경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창덕궁 후원의 가장 높은 곳 능허정에 우뚝 선 왕들은 눈 쌓인 산과 나뭇가지에 만발한 눈꽃,

         상고대, 순백의 눈 속에 파묻힌 한양의 여염(閭閻)을 내려다보며 저마다 시인(詩人)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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