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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매, 그리고 정조 어찰첩

아라홍련 2013. 3. 21. 03:02

                        

                                         <경매에 나올 정조 어찰첩>

 

    

 

찢어진 승정원 일기(영조 38년 5월 27일)

240여년 전, 승정원일기는 이렇게 난도질을 당했다. 모두 100곳이 넘는다.

전체 페이지 자체가 사라진 곳도 무수하다. 모두 사도세자의 비행이 기록돼 있던 곳이다.


 

위에 있는 두 개의 사진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착잡하다...

둘 다 정조와 연관이 있기 때문이다.

내게 정조는 27명의 조선 왕들 중에서 가장 애잔한 마음이 가는 특별한 임금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사도 그렇고, 무엇보다 그가 가장 책을 좋아한 왕이었기 때문이다.

앞서 이 블로그 글에서 언급한 적이 있지만, 정조는 그냥 책을 좋아한 것만이 아니다.

내탕금으로 중국에서 책을 엄청나게 구입했고, 규장각을 지었으며, 서얼 인재들을

뽑아 검서관으로 발탁한 인물이다.

그 중 한 명이 바로 활자중독자이자 간서치(看書痴)로 유명한 이덕무(李德懋)이다.

요즘 너도나도 활자중독자라고들 말하지만, 엄밀히 말해 아무 책이나 많이 읽는다고

활자중독자로 쳐주지 않는다. 

진정한 활자중독자들은 책에도 수준과 품위를 중요한 선택의 요건으로 삼아 독서를

한다. 깊이의 차원이 다른 것이다. 

또한 독서를 한쪽으로 편향돼게 하는 것도 바람직하게 보지 않는다. 

책을 선택하는 행태를 보면, 그 사람의 취향과 수준까지 대부분 파악할 수 있다.

그가 보는 책이 바로 그 사람인 것이다.    

그런 면에서 정조가 재위 당시 읽은 수많은 책들과 수집한 책, 책의 정리와 보관에

애쓴 공로, <홍재전서> 같은 훌륭한 저술을 남긴 것을 보면, 정조야말로 진정한

활자중독자이자 위대한 학자라고 말할 수 있다.

뿐만 아니다.

정조는 철종의 할아버지였으며, 주(酒)는 즐겼으되 색(色)에 침혹하지 않았다.

정약용의 표현대로 내관이나 궁녀들을 좋아하지도 않았고, 그들의 수작에 넘어가지도

않았다. 또 자신에게 매우 엄격하고, 철저하게 검소한 생활을 했던 임금이다.

경술에 밝기만 하면 양반이나 서얼을 가리지 않고 인정해 그들의 학식과 능력을 높이

사 두루 적시적소에 활용했으며, 그들의 재능을 어버이처럼 사랑하고 총애한 그의

관엄(寬嚴)함도 나는 좋아한다.

...... 하지만, 꼭 여기까지이다.   

정조에 대한 나의 개인적인 감정은 여기까지이다.

나는 자신의 취향이나 개인감정을 실제의 역사와 혼동해서, 역사 왜곡을 마구 일삼는

사람들을 경멸한다.

특히 자신이 좋아하는 왕의 공과를 구분하지 못한 채, 오로지 자신이 선호하는 왕을 

거품을 물고 성군이라고 부르짖는 사람들을 단천(短賤)하다고 생각한다.

단순한 이분법 뇌구조와 돈벌이에 대한 탐욕이 합쳐지면, 역사 왜곡은 겉잡을 수 없이

파장이 커지게 된다.

그래서 내가 좋아하고, 왠지 안스럽고, 왠지 애련하게 느껴지는 정조에 관한 나의

애틋한 감정은 꼭 여기까지이다.

 

맨 위의 사진은 3월 27일, K 옥션 경매에 나올 정조의 어찰첩이다.

시작가가 12억이고, 문화역사 가치로는 20억을 전망하는 편지모음집이다. 

2008년에 경매에 올라왔던 정조의 또다른 편지모음인 정묘어찰첩(1권.64통)은

경매에서 8,000만원에 낙찰된 바 있다.

하지만, 이번 경매에 나올 어찰첩은 총 297통이나 된다.

규모 면에서 정묘어찰첩과는 상대가 안 된다.  

일부 대필한 것을 제외하곤, 모두가 정조의 친필로 확인됐다.  

아마도 한국에서 가장 비싼 편지로 기록될 여지가 많다.

난 몇 년 전, 이 어찰첩이 공개됐을 때의 당혹감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내가 알고 있던, 내가 전에 생각하던 정조와 너무나 달랐기 때문이다. 

우선 어찰첩에 실린 문체와 단어들, 마음에 들지 않는 신하들에 대한 욕설이 범상하지

않았다. 최측근인 '서영보'를  "호로자식"이라 욕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학자인

'김매순'을 "입에서 젖비린내 나고 미처 사람 꼴을 갖추지 못한 놈"이자 "경박하고

어지러워 동서도 분간 못하는 놈"으로 "주둥아리를 함부로 놀린다."고 혹평하기도 했다.

또 문체반정을 일으켰던 정조가 한문을 쓰다가 '뒤죽박죽' 같은 한글을 마구 섞어쓰기도

하고, 현대에서나 쓸법한 욕설에다 속담과 고사까지 자유롭게 사용하는 등, 편지엔 그의

다혈질적이고 강박적인 면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그래서 일부 학자들이 연구를 해오던 이 어찰첩이 2009년 처음으로 성균관대 동아시아

학술원을 통해 공개됐을 때 '정조 시대의 판도라 상자'라고 불리기도 했다.

 

허나, 더 충격적인 사실은 비밀편지를 통해 정조의 막후정치이자 공작정치의 진면목이

백일하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어찰 내용은 21세기 이 시대에도 결코 뒤지지 않을 공작정치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었다.

한마디로 정조 '막후정치(幕後政治)'의 달인이었다.

그의 정치는 한마디로 '짜고 한 비밀정치'였다.

그동안 정적으로 알려지고, 정조를 독살한 장본인으로 억울한 누명까지 쓴 노론 벽파의

영수 심환지는 사실상 정조의 심복이었음이 비밀편지를 통해 밝혀졌다.

학자들은 정조의 이런 정치행태를 효종으로부터 배웠을 것으로 추측한다.

효종은 북벌을 모의하는 과정에서 송시열과 비밀편지를 주고받으며 막후정치를 펼친

있다.

더구나 그 많은 편지들이 정조 독살의 주범으로 의심당하던 심환지와 비밀리에 주고받은

편지인지라 학자들의 충격은 더욱 컸다. 

정조는 승하하기 며칠 전까지 자신의 병세를 상세하게 적어 심환지에게 비밀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심환지가 이 편지들을 정조로부터 받을 동안, 그는 예조판서와 우의정, 좌의정을 지내며

노론 벽파의 수장노릇을 했다.

그리고 순조 때는 영의정을 역임했다. 

정조는 편지를 보낼 때마다 "이 편지를 보고 나면 즉시 찢어버리든지 세초(洗草), 즉 물에

씻어 없애버리라."고 보안에 대해 엄명을 내렸다.

그리고 편지 내용이 간혹 새어나가는 것에 대해서는 "매번 입을 조심하는 일 한 가지만은

탈이 생기는 것을 면하지 못하니, 경은 생각 없는 늙은이라 하겠다."고 신경질적인 질책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심환지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왕명을 어기고 어찰첩까지 만들어

편지들을 고스란히 숨겨두었다가 후손들에게 남겨주었다.

심지어 정조에게서 편지를 언제 어디서 받았는지까지 정확하게 기록해놓았다.

그리고 오랜 세월동안 비밀편지들이 돌고 돌아 만천하에 공개되고 결국 경매까지 올라가게

됐다.

덕분에 <정조실록>이나 <승정원일기> 같은 공식 사료에서는 그 맥락을 알 수 없는 역사적

사건들과 정치적 이면, 정조의 속내, 그리고 정조의 인간적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를 수백 년 세월을 뛰어넘어 접하게 됐다.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낀다.

 

아래의 두번 째 사진은 정조가 조부인 영조가 승하하기 전, 사도세자의 대리청정 때의

비행들이 고스란히 적힌 승정원일기를 없애달라고 울부짖으며 통사정을 해 영조가

찢어버린 승정원일기의 한 부분이다. 

240여년 전, 승정원일기는 정조 때문에 이렇게 난도질을 당했다. 

모두 100곳이 넘는다.

전체 페이지 자체가 사라진 곳도 무수하다.

모두 사도세자의 비행이 기록돼 있던 부분이다.

1775년, 82세의 연로한 영조가 몸져눕게 되자 대리청정을 하게 된 왕세손(정조)은 조부의

병구환에 전심전력했다. 마침내 영조의 병세가 호전되자, 상복처럼 흰 옷에 흑대(黑帶)를

맨 왕세손은 할아버지에게 상소를 올렸다.

아버지 관련 기록 일체를 할아버지가 직접 삭제하여, 훗날 있게 될지도 모를 후환을 없애

달라는 읍소였다.

손자의 구구절절한 상소를 읽고 눈물범벅이 된 영조는, 사도세자가 대리청정했던 시절

(1745~1762)의 <승정원일기>를 모두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손자와 더불어 관련 기록들을 일일이 찢어 없애버렸다.

역사조작을 한 것이다.

대신 정조는 아버지 문제를 불문에 붙일 것을 할아버지에게 맹세해야만 했다.   

또 아버지의 이복형인 효장세자(진종)의 아들로 입적된 후에야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

허나, 정조가 즉위하면서 한 대갈일성(大喝一聲)은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이다!"였다.

왕이 되는 순간, 할아버지 와의 약속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정조가 나쁜 왕인가?

정조를 나쁜 왕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그건 절대로 아니다.

아무도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아버지인 사도세자에 관한 일만큼은 효심이 극심한 나머지 벌인 일이다.

아마도 어렸을 때 아버지의 일을 목격한 트라우마가 너무 커서, 사도세자에 대한 일에

있어서는 이성을 잃은 면이 많이 보여진다.

또 공작정치와 막후정치를 한 것은 당대의 정치상황이 그만큼 불안하고 급박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정조의 어찰첩을 자세히 살펴보면, 백성을 사랑하고 걱정한 흔적들이 곳곳에 배어있다.

왕의 가슴 속에 생령들이 얼마나 많이 자리했는지, 또 백성을 얼마나 긍휼히 생각했는지

왕의 인애한 마음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밤새도록 책을 읽으며 백성들의 안위를 걱정하고, 눈이 침침하여 글씨도 잘 분간하지 못할

상황에서도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하기 위해 늘 최선을 다한 모습이 보인다.

나는 위에서 밝혔던 이유 때문에, 정조에 대해 늘 애련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마음은 어찰첩이 공개됐다거나, 승정원 일기가 찢겨나갔다고 해서 달라지는 게

아니다.

나는 정조에 대해 개인적으로 느끼는 감정과, 사료에 나타난 사실들을 엄격하게 분리해서

생각한다.  

그래야 비교적 진실에 가깝게 다가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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